추구미와 쭈꾸미 그 어느 사이.
나는 너 고수 좋아해?라고 물어보면 ‘응 좋아해. 근데 쌀국수에 들어가는 고수는 내 스타일 아니더라.’라고 자세히 말할 만큼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이다. 이런 나의 호불호가 흐릿해지는 영역이 있다. 바로 ‘패션’이다. 불과 2년 전까지는 패션 취향도 호불호가 강했고, 특히 힙한 스트릿 패션 쪽을 좋아했었다. 그러나 나이 때문인 걸까..? 갈수록 나의 패션 취향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옷을 사려고 스트릿 코디 모음을 보는데 뭔가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미묘한 포인트들이 마음에 안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옷을 못 샀다. 이후에도 몇 번이나 패션 앱을 들락날락했는데 시간만 왕창 쓰고 번번이 쇼핑에 실패했다. 쇼핑앱 방문 횟수에 따른 나의 스트레스 지수는 갈수록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하여 ‘내 스타일 찾기 대장정’에 돌입했다.
험난했던 대장정의 시작은 유튜브였다. 다양한 패션 유튜버들의 룩북부터 언박싱까지. 섬네일을 보고 조금이라도 내 마음에 든다 싶으면 들어가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 내 스타일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구독하는 유튜버만 생겼다. ㅎㅎ
다음 도착지는 패션 플랫폼이었다. 패션 플랫폼 속에서는 스타일마다 구분된 코디 룩북을 집중 탐구했다. 여러 코디들을 보며 힙한 스타일도 좀 괜찮고, 캐주얼한 스타일도 내 무드에 어긋나지는 않은 것 같고……의 굴레에 빠졌다.
결국 내 스타일 찾기 대실패! 그저 내가 얻은 것은 새삼 각자의 개성에 따라 다양하고 뚜렷하게 옷을 잘 입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뿐이었다. 탐색 과정에서 확고한 패션 취향이 있는 사람들을 보며 뚜렷한 개성이 없는 내가 재미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면서도 원래는 확고한 취향이 있었던 내가 흐려졌다는 사실 자체가 복잡 미묘했다. 패션이라는 것은 나를 표현하는 하나의 창구인데 이를 잃어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컸다.
그러다 문득 ‘엥, 왜 이런 쓸데없는 고민으로 날 괴롭히고 있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가벼워지자 별안간 결론이 났다. ‘그냥 나는 선호하는 코디가 있는 것이지 뚜렷하게 좋아하는 스타일은 없네? 입고 싶은 코디 있으면 그대로 입자.’라고 말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확고하게 한 가지의 스타일을 좋아한다기보다 여러 스타일 속 몇 가지 확 꽂히는 코디가 있는 사람이었다.
무슨 패션 취향 가지고 이렇게 심오하게 고민을 하냐?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호불호가 확고한 사람으로서 ‘원래 알고 있었던 내가 아니야.’라는 것을 처음 느낀 게 패션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변화를 싫어하는 사람인데 확고했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이어서 더욱 방황했던 것 같다. 그리고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이것이 나쁜 현상이라고 생각했었다.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새로운 나의 스타일을 찾아가며 깨달은 것이 있다. ’ 인생은 나에 대해 끊임없이 알아가는 과정이구나!’ 나이가 들며 환경도, 주변 사람도 바뀌고 이에 따라 자연스레 나도 바뀌기 마련이다. 내가 재수부터 알바까지 사회의 여러 풍파를 맞으며 ESFP에서 ISTJ로 정착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제는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면서 또 다른 나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혹은 같은 경험일지라도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나를 파악해 가는 과정도 짜릿하고 새롭다!
그렇다면 내 패션은 어떻게 하고 있냐? 스타일 찾기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나는 핀터레스트 속 다양한 코디를 보며 참고하며 필요에 따라 활용하고 있다. 유행하고 있는 코디를 무작정 따라 하지도, 확실한 패션 취향이 없는 것에 스트레스받지도 않는다. 물론 언젠가 또 나의 취향이 바뀔 수 있다. 그렇지만 그때도 내 마음의 소리를 반영하여 지금처럼 바뀐 나에 대해 알아가고 그때의 내 마음을 따를 것이다. 추구하는 이미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항상 바뀔 수 있으니까.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나의 추구미는 결국 누군가를 기준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기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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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