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니의 제주살이 6
봄이 되자 제주도에는 여기저기 고사리 꺾으러 간다는 이야기들이 들렸다. 제주 도민이 되니 이곳 사람들이 철마다 즐기는 문화들에 관심이 많았는데, 제주에 살고 있는 선배 언니의 고사리 꺾으러 가자는 말에 들뜬 마음으로 출발했다.
언니와 형부, 그리고 나. 점심을 먹고 고사리가 난다는 비밀 스폿에 갔다. 제주 할망들에게는 당연히 비밀이 아니겠지만 생 고사리를 처음 보는 나에게는 신비의 숲 같은 곳이었다. 늘 말린 고사리만 보다가 땅에서 자라는 고사리를 보니 신이 났다. 고사리는 ‘딴다’라고도 하지만 다른 나물들과는 달리 ‘꺾는다’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국어사전을 보면 ‘긴 것을 힘을 주어 구부리거나 끊다’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고사리는 꽤 길쭉하게 자라 있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이미 새벽부터 할망들이 싹쓸이를 해 간 건지, 고사리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점심 먹고 한 시간 간 거였는데, 보통은 해가 뜨기 전부터 오전 안에 작업을 다 마친다고 한다. 제주도는 햇빛을 피하기 힘들어서 몇 시간이고 밖에 있다 보면 엄청 새까맣게 타고 힘들기 때문이다.
다시 차를 타고 조금 더 깊은 곳으로 갔더니 멀리서도 고사리가 쑤욱 쑤욱 올라와있는 것이 보였다. (사실 내가 본 건 아니고 언니가.) 언니는 몽골인의 시력을 가진 건지, 정말 멀리서도 ‘저기 많네! 저기 다 보이잖아!’라고 했다. 초록 초록한 풀 밖에 보이지 않는 나는 ‘역시 제주살이 10년 차는 다르군!’ 하고 감탄했다.
해마다 고사리를 꺾다가 뱀에 물리는 사고, 실족하거나 길을 잃는 사고가 생긴다고 들었다. 당연히 산속에서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직접 고사리를 꺾어보니 정말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로부터 제주는 뱀신을 믿는 신앙이 존재할 정도로 뱀이 많았고 실제로 한라산에서는 뱀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크기가 엄청난 뱀들은 아니지만, 아주 날쌔고 빠르므로 사람이 당해낼 수 없다. 고사리가 많이 있는 산에서는 반드시 뱀을 조심해야 한다.
고사리를 꺾다 보면 욕심이 생긴다. 손맛이라 해야 할까? 길쭉하게 20센티쯤 올라온 고사리를 ‘톡!’ 하고 꺾을 때의 쾌감과 성취감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굉장했다. 땅만 보고 바로 앞에, 또 바로 앞에 있는 고사리들을 꺾어 담다 보니 10미터 20미터 이동하는 건 금방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발을 헛디디기 십상일 것 같았다. 그래서 고사리 채취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간 곳은 어떤 가족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는데(무덤 주변에서 꺾다가 점점 가까이 가게 됨;;) 땅만 보고 허리를 숙인 채 톡, 톡 고사리를 꺾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무덤이 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고사리 잘 먹겠습니다.’ 하고 잠시 인사를 한다. 그리고 또 놀란 것은 왜 그렇게 무덤 위에 고사리가 많은지.. 차마 봉분 위에 있는 고사리들은 못 가져오고, 그 주변에 있는 고사리들을 꽤 많이 가져왔다.
손맛에 중독되어 다 꺾어 가고 싶었지만, 바다에서 작은 물고기를 그냥 놓아주는 것처럼 아직 덜 자란 고사리는 두고 왔다. 비가 한 번 흠뻑 오고 나면 더 쑥쑥 자라겠지 하면서.
집에 와서 고사리 손질 방법을 당근 마켓에 물었더니 여러 사람이 답을 달아주었다. 나는 고사리를 씻어서 데쳐서 다시 찬 물에 하루정도 담갔다가 물기를 탈탈 털어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한 달쯤 뒤 할머니, 엄마, 동생이 제주에 놀러 왔을 때 다 같이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할머니는 고사리를 직접 꺾어왔다는 사실이 우스운지 계속 웃으셨고, 엄마는 내가 고사리를 야무지게 한 방향으로 정리해 냉동한 것에 놀랐다.
다음 봄에는 조금 더 많이 따와서 육지에 있는 가족들에게 좀 보내줘야겠다. 그 무덤 주인은 분명 너그러운 분이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