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괜찮은 걸까
문득, 직장에서 지옥 같은 하루를 보내고 퇴근하자마자 아랑곳 않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제 더는 어찌 돼도 좋아 라는 심정으로 오늘 갓 개봉한 코난 영화를 보고, 마지막 감탄사에 다 같이 오오-하고 감탄하며 오타쿠적인 즐거움을 느끼고 덜컹이는 차 창안에서 방금 먹은 캐러멜 팝콘의 여파인지 더 부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내가 정말 되고 싶은 게 이런 모습인 걸까. 하지만 한편으론 깊은 안도를 느꼈다. 이렇게 살아도 계속 돈을 주는 직장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 쓰레기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배덕감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원래 직장을 증오하던 이였다.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최하위 집단, 그것이 근로자라고 생각했고 그 과정 자체를 그저 통과 의식의 한 도구로만 여겨왔다. 그러나 직장인이라는 무리에 들어가게 되고 그 무리 안에 섞여 생활하면서 나도 모르게 점차 그들과 같아졌다. 9시간 정도만 내가 나인채로 있기를 포기하면 주어지는 달콤한 저녁 시간과 5시간도 채 되지 않는 자유에 만족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회피적 고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훌륭한 신입으로 인정받고 키워졌다면 과연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안락하고 포근하고 심지어 복지도 많고 주변 급여 수준에 비해 결코 낮지 않은 이곳을 떠날 생각을 했을까? 이런 고민을 던지고 나니 내가 마치 인생의 중대한 패배자라도 된 듯한 생각에 갇혀 더는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갑갑하고도 짜증 나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위권 아이들일수록 부정적인 피드백이나 실수에 취약하다고 했는데, 내가 그런 나약한 상위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상위권이라는 건 자랑이 아니라 그냥 팩트다. 하지만 이걸 강조해서 적는 걸 보면 역시 자랑일지도. 아아 모르겠다. 작고 연약하고 취약하며 자존감은 높고 그런데 현실은 그에 미치지 못해서 자꾸만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견딜 수 없이 미워진다.
직장을 증오하면서 직장에 다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입으로 외치고 다녀서 이런 고민에 놓이는 것일까? 왜인지 단순하게 생각하면 쉽게 풀릴 고민을 가지고 나 혼자 끙끙대고 있다. 내가 잘하고 있나?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걸까?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인생이란 뭘까? 직장이 그런 내 생각과 삶을 충족시켜줄 수 있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대체 뭐가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지?
역시 나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만방자한 대답이다. 이게 내가 모태신앙이면서도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지 못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로서의 자아가 너무나도 강해서 결국엔 신적인 존재만을 믿고 나아가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어찌나 오만하고도 나약한 존재인가. 스스로에 대한 비난 섞인 말이 수십 가지가 떠오르지만 그마저도 꿀꺽 삼킨 채, 나를 정당화시키려, 나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만을 외치려 공허한 울림을 반복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아서 조그맣게 작아지다 결국 사라지고 말 먼지 찌꺼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뭐라도, 하나라도, 작은 의미 없는 몸부림이라도 해서 결국 점차 커질 대나무가 될 것인가. 지금은 보이지도 않고 미약하게 삐죽 나온 죽순만이 흙먼지를 가르고 그 자리에 우뚝 박혀 있다.
그러나 그 아래에 있는 것이 장차 거목이 되어 쑥쑥 성장할 토대인 뿌리인지, 아니면 그저 죽순의 형체를 간신히 유지하는 썩어빠진 나무가 될지는 나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허울 좋은 말로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쓸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현재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아아 역시 아직은 모르겠다.
20대는 고민의 시기라고들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누구보다 지금의 20대를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거면 됐지 않나?
아니, 불충분해.
나는야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의 자외선 앞에 무기력하게 늘어진 고깃덩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