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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민 Aug 02. 2021

딸과 아들의 차이

엄마의 '손이 많이 가는 큰 일'인 제사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는 터울이 큰 큰아버지와 두 형제분이다. 큰아버지 생전에는 손이 큰 큰어머니 주도하에 큰 집에서 잔치 날처럼 왁자지껄하게 지내던 제사의 추억을 나는 갖고 있다.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해되지 않아, 아버지는 큰어머니가 넌지시 운을 떼자마자, 제사를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제사를 작은 집인 우리 집으로 넘기는 큰어머니의 명분은 아들이 둘인 우리 집과 달리 큰 집은 딸만 있기 때문이다.      


당시 친정엄마는 부담스러운 눈치를 보이긴 했지만, 아버지 뜻에 일절 토를 달지 않았다. 제사 때문에 엄마가 감수해야 할 고생이 불 보듯 뻔한데, 한 마디 불평 없이 순순히 제사를 받아들이는 엄마를 당시에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훗날 ‘조상을 잘 모셔야 자식들이 잘 된다’는 친정엄마의 이야기를 듣고야, 엄마의 큰 그림(?)을 알게 되었다.     

 

친정집 제사는 증조부모와 조부모의 각각 기일과 명절까지 1년에 여섯 번이었다. 그 일은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딸 셋은 모두 출가했고, 큰아들은 미국에 있고, 막내아들은 미혼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엄마는 ‘제사 음식이 성에 차지 않아서인 듯, 제사를 지내는 내내 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며 속상해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엄마는 제사 준비를 하면서, 제수(祭需) 거리가 시원찮으면, 본인도 모르게 아버지의 눈치를 보게 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는 제주(祭主)가 된 남동생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해 후, 친정엄마는 몇 년을 벼르다가 조부모님의 제사를 합쳤다. ‘조부모의 제사를 하나로 합치는 것은 옛 부터 해왔던 거’라는 여러 차례에 걸친 엄마의 부연 설명은 제사를 합친 편치 않은 엄마의 마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엄마가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를 합치기로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조모의 기일이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음력 칠월 초아흐레라는 점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미루어 짐작하고 있다. 무더위 속에서 며칠동안 진행되는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엄마의 고생도 말할 나위 없지만, 그보다는 제군(祭君)으로 참석하는 사위들의 불편함을 보는 게 엄마로서는 더 힘들었을 거라는 게 내 짐작이다.     


“절에서 못 오게 하면 절처럼 과일이랑 떡만 놓고 간단하게 지내기로 했어”     


며칠 전 친정엄마는 8월 중에 할머니 제사가 있으니, 정확한 양력 날짜를 확인해보라고 했다.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며 ‘이 더위에 어떻게 집에서 제사를 지내냐’며 펄쩍 뛰었다. 요즘 더위는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만 하는 것으로도 견디기 쉽지 않기 때문에 거의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나의 과민한 반응이 제사 음식 준비를 도와야 하는 딸의 힘듦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챈 엄마는 민망한 듯 하하하 크게 웃기만 하더니, 동생과 숙의를 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엄마가 할머니 제사를 할아버지 제사에 엎어 함께 지냈는데 싶어, 엄마에게 사실을 확인했다. ‘절에 제사를 맡기면서, 두 분 제사를 합친 게 맘에 걸려, 돈을 조그만 더 쓰면 된다 싶어 다시 분리했다’며 멋쩍게 설명했다. 말하자면 절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할머니 제사가 부활(?)하였는데도 나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나에게 친정집 제사는 ‘조상 모시기’라기보다, 민족의 고유 전통이며 풍습으로 엄마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손 많이 가는 큰 일’일 뿐이다.     


힘에 부쳐서인지, 아니면 제사 때마다 출가한 딸들의 도움이 불편해서인지, 3년 전 엄마는 기제사를 인천에 있는 사찰에 맡겼다. 몇 년 동안 궁리 궁리한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임을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우리 딸들은 다 안다.     


한 번의 기제사를 위해 몇십만 원을 내면, 스님의 주관 아래에 단체로 의식이 치러진다. 제단은 개인별로 준비된다. 위패와 사과, 배, 감 등 몇 가지 실한 과일과 푸짐한 떡으로 마련된 제사상은 제법 모양새를 갖춘다. 더욱이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읊조리는 스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처음 기제사에 참석했을 때, 친정엄마가 제단을 보고 안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우리 자매들도 아침 일찍 엄마와 함께 나들이 가듯이 인천에 있는 절에 가서 제례의식에 참여만 하면 된다.       


절에서 첫 제사를 지낸 후 엄마는 ‘본인의 사후에 자식들이 조상을 모시는데, 이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본인 제사도 그렇게 지내라는 당부을 했다.     


기제사 외 설과 추석 명절의 차례는 본인이 힘닿는 데까지 간소화하게라도 집에서 지내겠다고 했다. 조상들에게 죄스러웠는지 아니면 혹여 조상들이 노여워해 자식이 잘못될까 걱정이 되어서인지, 잔소리하는 딸들이 시댁 차례 때문에 참석하지 않을 테니 맘 맞는 아들과 편안히 지낼 수 있기 때문인지... 아직도 엄마의 ‘속’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아마도 이들을 포함하여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하는 수만 가지 이유로 엄마는 그런 결정을 어렵게 내렸을 것이다. 


코로나 발생이후 절에서는 방역단계에 따른 지침으로 제례 참가인원을 제한하거나, 참여 자체를 금지하는 바람에 지난해부터 다시 제사를 집에서 지내고 있다. 절에서 지낼 때보다 엄마와 제주인 남동생의 표정은 훨씬 밝다. 세 딸들은 엄마를 돕기 위해 각자 제사 음식 등 제사 준비를 다시 나눠 하고 있다.(2021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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