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 들어 콩 볶아 먹듯 하네”
어버이날 전 주인 어느 날, 함께 일하는 내 딸 또래인 20대 후반의 여직원들과 점심을 같이 먹었다. 대화의 주제는 날이 날인만큼 어버이날 선물로 모아졌다. 결론은 너무 쉽게 '용돈'이 최고라고 정리되었다.
나는 현직에 있으니, 자식들한테 선물로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다. 사실 현직이 아니더라도 돈으로 선물을 대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가 들으면 돈이 아쉽지 않아 ‘배부른 소리 한다’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맞벌이이긴 하지만 주부인지라, 돈으로 받은 선물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슬며시 생활비에 사용되곤 한다.
결혼한 두 번째 해부터 시어머님은 내 생일날이면 ‘10만 원’을 봉투에 넣어 주셨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주셨는데, 남은 것은 어느 해인가 작심하고 손가방을 산 거 그것 하나뿐이다. 나머지 수많은 '10만 원'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여든여섯 살의 시어머니와 아흔 살의 친청 엄마 두 분 다 자식들의 용돈 선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부담스러워한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하겠지만, 적어도 두 분은 ‘자식 돈’ 받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두 분의 형편이 결코 풍족하진 않다. 항상 아끼고 알뜰살뜰 생활하시는 것을 보면 그렇다. 두 분 모두 작고한 양가 아버님들이 각각 남겨준 집에서, 월 200만 원 정도의 생활비로 생활하신다. 특히 시어머니의 ‘자식 돈’에 대한 결벽증은 도를 넘어 남편의 화를 돋우기도 한다. 친정엄마 역시 ‘자식 돈’ ‘본인 돈’을 아끼려고 몸 고생하는 것을 보면 속이 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두 분께 드릴 어버이날 선물 고민은 연례행사다. 이번 어버이날 선물은 경기도 재난지원금의 사용 용처를 궁리하던 엄마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공(空) 돈’이라고 좋아라 하며 평상시 선 듯 사지 못하던 것들에 대해 기억을 더듬으며 계획(?)을 세웠다. 그중에 ‘우족과 사골’이 있었다. 시어머니께도 제격일 거 같아 '일타 쌍피'의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는 건강에 대해 무척 예민하셔서, 코로나가 시작된 작년 초부터 집에 외부인 방문이나 음식 반입을 금지하고 계셨다. 끓인 음식이니 문제없을 거라는 게 남편의 판정(?)이었다. 곰국 재료를 사서 내가 직접 끓여 두 분께 어버이날 선물로 갖다 드리기로 결정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유튜브의 곰국 끓이기 콘텐츠를 이것저것 구독하며 학습했다. 5월 4일 퇴근길에 미리 주문해 둔 사골과 우족, 잡뼈를 사 왔다. 양지고기, 사태고기, 스지도 함께 샀다. 두 분의 선물인 만큼 넉넉히 구입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곰국 끓이기에 돌입했다. 첫 단계는 핏물을 빼기. 밤새도록 핏물이 빠지도록 들통에 물을 받아 곰국 재료를 넣어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5월 5일 어린이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족들의 아침 식사 준비도 뒤로 하고 들통에 물을 펄펄 끓여 뼈와 고기 덩어리들을 튀겨냈다. 튀겨 낸 것들을 하나하나씩 찬물로 깨끗이 씻었다. 곰국에 잡내를 제거하기 위한 거다. 깨끗이 씻은 뼈와 고깃덩어리를 물 받아 놓은 큰 냄비에 담아 센 불로 끓였다.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중불로 조절하고 고우기 시작했다. 얼추 6시간을 고운 첫 번째 곰국을 빈 냄비에 담고 국자로 위에 떠 있는 기름을 제거했다. 중간에 고깃살은 건져두었다. 어린이날 하루를 온전히 어버이날 선물 준비로 보낸 셈이다.
곰국은 보통 세 번 정도 고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퇴근하고 고우기를 몇 차례 하여 어버이 전 날까지 곰국을 고았다. 집 안은 구수한 곰국 냄새로 진동했다. 정성이 들어가서인지 미각이 발달한 아들내미의 ’맛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어버이날 당일, 아들과 함께 시어머님 집에 곰국 한 솥과 수박 반 덩어리를 들고 갔다. 수박 한 덩어리를 다 가져가면 너무 많다고 말씀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곰국 좀 끓여 왔어요”
“아이고 힘들게..., 고맙다. 잘 먹겠다.”
코로나 때문에 문 밖에 서서 어머니께 인사하고, 가져간 물건을 건네며 어머니 표정을 살폈다. 반기는 기색이다. 지난해 화장품 선물을 건넸을 때 표정과는 사뭇 다르다. 어머니도 이젠 연로하여 곰국을 끓여 드실 엄두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엄마에게는 다음날 곰국과 함께 참나물과 취나물 무침을 해서 가져갔다. 요즘 이가 부실하여 나물 반찬으로 식사하는 엄마의 맞춤형 선물이다.
“야가 왜 이러노..., 내가 해서 나눠 먹으려 했는데...”
미안해하는 기색이었지만, 표정은 밝다. 친정엄마와는 내친김에 목욕탕도 같이 갔다. 코로나로 맘 편히 갈 수 없는 곳이지만, 평생 공중목욕탕을 다닌 친정엄마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나들이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목욕하는 진풍경이지만, 뜨근한 탕에 몸을 담근 엄마의 표정은 더없이 편안했다. 목욕 후 가져간 손톱깎이로 엄마의 발톱까지 깎아 주었다.
“재미 들어 콩 볶아 먹듯하네...”
올해 들어 엄마의 자란 손톱과 발톱이 종종 눈에 띄었다. 볼 때마다 깎아 주었더니 하는 말이다. 어버이날 마지막 선물(?)까지 받으며, 환하게 웃는 엄마의 모습이 나를 정말 행복하게 했다.(2021. 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