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성호 Mar 13. 2017

작은 역할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

의자를 놓는 일.

돌아보면 내 인생은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작은 것에서 시작되었거나 이루어졌다.

뒤늦게 책 읽는 재미에 빠져 일주일에 두 권 정도는 꼬박꼬박 책을 읽을 때였다. 절실함이 있어서였을까? 책을 읽고 나면 그 책을 쓴 저자들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저자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했다. 


막연하게 생각하면 그 대단한 사람들이 나를 만나 줄까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저자들은 흔쾌히 만남을 허락해 주었다. 실제는 그렇지도 않은데 나 스스로 지레 벽을 만드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저자들을 만나러 다니면서부터다. 


하지만 특별한 고정 소득이 없으면서 저자들을 매번 찾아가는 것이 비용면에서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강사가 되겠다고, 하던 일을 다 그만두고 오로지 강사과정과 책 읽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마침 매주 한 번 저자들을 모시고 하는 무료 북토크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적어도 이 북토크쇼에 오면, 저자들을 따로 만나느라 쓰는 찻값이나 밥값은 절약할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매주 이 북토크쇼를 찾기 시작했다. 


매주 참여하다 보니 스태프들과도 친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끔 일찍 도착하는 날에는 스태프들과 함께 의자를 놓고, 방송장비를 세팅하는 등 준비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스태프 아닌 스태프가 되어 있었다.     


MC 한 번 해보실래요? 

 

네 명의 MC가 로테이션으로 진행하던 북토크쇼였는데, 갑자기 한 명의 MC가 함께할 수 없게 되면서 다음 주의 진행자가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이 북토크쇼를 총괄 기획하고 진행하던 대표님이 느닷없이 내게 물어온 것이다.     


“강사 준비하고 있다면서요? MC 경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어떠세요?”   

  

평소의 나였다면 선뜻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믿고 맡겨주는 대표님과 스태프들의 제안이 정말 감사했고, 감동이었다. 또 하나, 나는 어느새 청중이라기보다 스태프에 가까운 입장이어서 당장의 공백을 해결해야겠다는 마음도 MC를 수락하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그것이 <손대희의 리얼북톡>의 시작이었다. 방송을 위해 저자들과 사전 미팅을 하고, 콘셉트를 잡고 진행까지, MC로서 1년 가까운 시간동안의 경험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후 강사로서 강의하는 데에도 <손대희의 리얼북톡> MC 경험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북토크쇼 MC라는 타이틀은 동기부여강사인 나에게 스펙 아닌 스펙이 되어 비슷한 경력의 다른 강사들에 비해 강의료를 더 받는 것은 물론, 나중에는 <손대희의 리얼북톡> 포맷으로 정식 유료 콘서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예측이 가능한 사람이었어요. 손대희 선생님은. 그만큼 신뢰가 갔다는 이야기예요. 의자 하나 놓는 일도 기꺼이 함께해 주는 모습이 언젠가는 같이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했으니까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문득 나에게 온 MC라는 기회가 어쩌면 ‘우연’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누군가는 하찮게 여기는 ‘의자를 놓는 일’이었다. 의자나 놓던 청중 중 하나에 불과했던 나는, 북토크쇼의 MC를 한번 해 보고 싶어서 대표님 근처에 다가왔다가 어느샌가 사라지는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던 기회를 얻게 되었다.     


아무리 위대한 일과 업적이라도 모두 ‘처음’에서 시작됐다. 완벽하게 시작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직이나 팀 안에서 모두가 같은 비중의 역할을 맡을 수는 없다. 하지만 하찮아 보이는 역할도 분명 필요한 역할이다. 99℃의 물이라도 마지막 1℃를 올리지 못하면 끓지 않는다.   

   

‘내가 이러려고 이 회사에 들어왔나 하는 심한 자괴감을…….’     


사회 초년생일 때 정말 많이 하는 고민이다. 무시무시한 취업 전쟁을 치르고 입사했는데 정작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복사 또는 커피 타는 것과 같이 하찮은 일이다. 선배들처럼 멋지게 기획서도 써 보고 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도 해 보고 싶은데 좀처럼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한 경력이 부족해 나에게 단기 알바라도 부탁했던 친구가 있었다. 당시 나는 대형할인마트의 정육 코너에 근무하고 있었다. 마침 단기 알바를 구할 일도 있어서 기꺼이 그 친구를 추천해 6개월 정도 함께 일했다. 


비록 할인마트의 정육코너였지만 우리나라 1위 기업의 타이틀을 달고 있었기에 6개월 뒤 친구의 경력증명서는 그럴듯하게 포장됐다. 그 덕인지 친구는 누구나 알만한 최고의 외국계 기업에 보란 듯이 합격했다. 그리고 3개월 뒤 다시 백수가 되었다. 매일 커피나 타고 심부름이나 하는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유도 모르게 혼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며칠 전 10년 만에 그 친구를 만났다. 난 놈은 난 놈인지 그 후 우리나라 굴지의 공기업에 들어간 친구는 새로 들어온 신입 때문에 불만이었다. 


“커피도 한 잔 제대로 못 타온다니까. 단 두 잔을 타도 물의 양이 달라. 복사는 또 어떻고, 한 번도 완벽하게 해온 적이 없어.”     


하찮게 생각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후임에게 더 중요한 일을 맡길 상사는 없을 테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작은 일 하나를 제대로 해야 그보다 중요한 일이 나에게 맡겨진다. 지금 하는 일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작은 일이라고 생각되면, 누구보다 열심히 잘 해보길 권한다. 그래야 조금 더 중요하고 큰 일이 나에게 맡겨질 테니까 말이다.


최고의 꿀알바라고 불리는 한국 민속촌의 거지 알바는 최근 정직원이 되었다. 적당히 해서 용돈이나 벌자는 마음가짐으로 했다면 그런 파격적인 대우는 없었을 것이다. 빈 캔버스의 점 하나와 모나리자 같은 명화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면 열이면 열, 모두 명화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자. 모든 명화는 빈 캔버스에 점을 찍는 일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당당하자. 작은 역할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