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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Feb 13. 2021

'텔레스'는 다 생각이 있었구나

'시작이 반'이라는 그 위대한 말은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때 우리를 가장 위축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최종 목표가 당장은 손에 닿기 어려운 높은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지레 겁먹고 시작조차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상은 해보면 별것도 없는데 말이지. 그 마음을 수차례 고쳐먹어도 역시나 시작은 어렵다.


일상에서의 사례는 꽤나 다양한 분야에서 찾을 수 있는데 예전 어떤 유명 작가는 인터뷰에서 말하길 원고를 쓸 때에 마감시간을 불과 몇 시간 앞에 둔 그 순간까지도 한 글자 적지를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는 일이 많다고 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지만 차마 써 내려가질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일에 집중할 여유는 없으니 그저 앉아서 생각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인다. 이렇듯 인기를 몰고 다니는 글쟁이들도 그 한 페이지의 글을 써 내려가는 시작이 이토록 어렵나 보다. 물론 글의 방향은 이미 정해졌고 단지 첫 문장을 고민했던 것으로 그 시작을 하기만 하면 멈추지 않고 써지곤 하니 마감기한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시작이 어렵지 한번 쓰기 시작하면 곧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시작이 반이다.


해본 적 없는 새로운 경험에서도 역시 시작이 가장 어렵다. 직장에서 점심시간에 홀로 자리에 앉아 목표한 책을 읽는 행동은 생각보다 쉽지만 그 다짐을 실천하는 시작은 생각 외로 어렵다. 주변에는 맵고 짜게 그리고 두 그릇씩 양껏 잡수는 회사의 선배들께서 오히려 나의 건강(?)과 안위를 앞다투어 걱정해주시는 덕에 조용히 홀로 앉아 책 속의 문장을 곱씹으려던 내 계획은 순간 사라지고 어느덧 원치 않는 음식물을 씹어 넘기는 자신을 마주할 때가 있다. 장은 양껏 먹은 덕에 고맙다고 신호(?)를 보내오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편하고 책을 읽으려는 그 다짐을 시작조차 못하며 많은 나날을 허비한 채 세월만 보내는 이들이 나 말고도 꽤 많았다(안 먹겠다는 사람, 도시락 싸온 사람, 자고 싶다는 사람들을 데려가려고 노력하지 맙시다?). 하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로 처음 한 번을 (강한 눈빛과 확고한 의지 그리고 신념에 찬 어조로) 말하는 것이 어렵지 막상 시작하면 모든 상황은 곧 자연스러워진다. 그때부터는 오히려 홀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의 양식을 쌓는 일이 쉬워지는데 매일 주어지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1시간은 꽤나 양적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되니 진짜 시작은 반이다. 물론 어느 순간 소외감이 나를 휘감을 때가 있겠지만 그런 것 다 감수하고 책 읽기를 하려던 것 아닌가. 어차피 우리의 인생이란 하나를 얻게 되면 다른 하나를 내어주어야 하는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Trade off) 성격이 강하다.


건강을 위해 주말에 바깥으로 나가 땀에 흠뻑 젖으며 헥헥거리는 나 자신이 그리워질 때가 있는데 그 때라는 것은 어디 하나 아프기 전에 시작해야 마땅한 생각이 되겠지만 이것도 역시 시작하는 그 순간이라면 여전히 어렵다. 평일을 위해 맞춰둔 알람이 주말에도 울리는 덕에 분명 새벽에 우리는 잠에서 쉽게 깰 수 있다. 설령 알람이 안 울려도 우리의 방광이 차올라 아침부터 일어나길 독촉하며 뇌에서 신호를 보내오기도 하고, 평일이면 같은 시각에 일어나 버릇한 덕에 몸이 기억하는 그 바이오리듬(?)으로 분명 새벽에 눈이 떠진다. 하지만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는 그 위대한 결심이 서는 행위란 참으로 어렵다. 책을 읽으며 쉽게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이 꼭 이럴 때면 '이불 밖이 가장 위험하다'며 애꿎은 책 제목에 괜한 공감을 불러 오려한다. 하지만 분명히도 일어나서 직립 보행하며 현관 방향으로 딱 서너 걸음만 걸어보면 분명 나가려는 그 결심이 곧잘 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일단 옷 챙겨 입고 문밖으로 나가면 걷고 오든 뛰고 오든 나가서 커피 한잔 사 먹고 오든 분명 어제의 생활보다 오늘이 더 건강해졌으니 이만하면 그 시작은 위대하며 절반이라 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때때로 그렇게 힘든 시작이었던 절반이 한순간에 꺾일 때가 있다. 첫 문장을 어렵사리 생각해낸 일반 작가가 문장을 이어서 써 내려감으로써 오늘의 글쓰기에 있어서는 시작을 해냈지만 양에 있어서는 절반에 더한 절반이 여전히 추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나 어렵게 시작한 첫 문장이 산으로 가는 길을 안내할 때도 있다. 이상한 부분을 걷어내고 다시 고쳤으나 이번엔 바다로 간다. 내용이 조악해지니 기껏 써놓고 발행을 못 눌러 여전히 서랍에는 제목 없는 글이 넘쳐난다. 아마도 저장공간이 부족하던 옛날(5.25"와 3.5" 플로피디스크를 쓰던 그 시절)이라면 이렇게나 제목 없는 글을 많이 가지고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터.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면 이건 사실 어디까지나 나 혼자 잘 해내면 될 일이고 끊임없이 생각을 고쳐먹고 노력하면 언젠가(?) 해결되는 일이다.


이와 달리 세상일이라는 것이 어디 나 혼자만 잘해서 되더냐. 점심에 밥 대신 마음의 양식을 쌓겠다는 나의 외침에도 그리고 점심을 알리는 종소리에 맞추어 분명히 바쁜 아침 시간 쪼개어 닭가슴살로 만들어 온 샐러드를 책 옆에 두어 마치 당장이라도 우걱우걱 먹으며 책을 읽을 의지를 내비치는데도 여전히 우리의 선배들은 나를 다이어트 때문에 그저 한 끼 굶는 사람으로 매도한다. 굶으면 위장병이 온다나 그리고 그런 것 먹어서는 살이 오히려 찐다나 뭐라나(진짜로 그러려는 목적이 아니라고요). 분명 쉬고 싶어서 쉬려는 행동을 두고 쉬엄쉬엄하라며 핀잔주는 그분들을 향해 나의 진심을 설명하고 나는 정말로 괜찮다며 안심(?)을 시켜드리기 까지는 정말 많은 고비가 필요하며 이것을 넘지 못한다면 결국 그 시작은 시작이라 할 수가 없다(마치 홍길동 같은 시작). 기왕 회사에 있는 한 시간씩을 빼내어 책 읽기에 할애하겠다고 다짐하였으니 어디 한번 해보자는 그 작은 시작은 종종 멈춤과 재시작이 요구되기도 한다. 정작 책은 한 장도 읽지도 못했는데 절반을 했다니.


졸린 눈 피곤한 몸 그리고 공감능력(?) 벗어던지고 바깥으로 나가서 공원을 가보면 이미 많은 사람들은 땅만 보며 뛰고 또 뛴다. 트랙을 돌고 또 돈다. 주춤하는 그 마음 다잡고 기왕 나왔으니 몇 바퀴라도 뛰어보자는 그 결심이 곧이어 나를 추월해가는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며 있던 힘은 사라지고 분명 없었던 지친 이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와 고작 그거 뛰고 그만둘 때도 있으니 그 시작을 해내긴 했으나 머지않아 한계를 만나고 다시 시작 전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


아니, 분명 시작은 절반이어야 할 만큼 위대한 것임에도 여러 이유로 그 다짐이 쉽게 무너지고 나니 결국엔 다시 이러고 있다. 어디 다시 시작하면 반의반을 추가로 쳐주려나. 약간은 약이 오르고 괜히 시작했나 후회도 생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진짜 아무것도 아닌 실천이 되어버릴 테니 다시 그 의미를 생각해보자. 사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사실은 '시작은 반이다'라고 하는 그 위대한 말은 우리말의 속담이 아니라 바로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위대한 생각이라는 점이다.


이쯤 되면 원문을 찾아보며 그 참 뜻을 곱씹어볼 필요가 느껴진다.





"Well begun is half done"


아뿔싸. 하마터면 아리스토텔레스를 욕할 뻔했다. 시작을 했음에도 넘어야 할 산과 벽이 워낙 높기에 그저 불평을 해보려 했는데 역시나 그의 생각에는 빈틈이 없었다. 영어를 워낙에 잘하는 분들이라면야 원문을 읽고 그대로 느끼겠지만, 보통의 한국 사람이라면 원문을 한글로 바꾸어 생각하는데 바로 그때 필요한 능력은 '의역'과 '직역'이다. 학문의 분야에 따라서 또는 상황에 따라 문장에 따라 그 쓰임을 달리 하여 해석해야겠지만 분명 저 문장이라면 '직역'해야 마땅하다. 순간 대단한 철학자의 뜻을 내가 곡해(?)할 뻔했으니. 이래서 바로 책을 많이 읽고 또 많이 읽고 또 많이 읽으며 생각하고 써봐야 한다는 조정래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굳이 표현해보면 "(잘 된) 시작은 절반이다"가 되고 그냥저냥 농담 삼아 장난 삼아 체험 삶의 현장처럼 한두 번하는 것을 두고 시작이라 해선 안되며 진짜로 시작할 때가 비로소 절반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길을 떠나도 돌아올 여지를 남기며 가는 편과 오는 편을 모두 확보해 두장의 티켓을 끊어 떠나는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라면 어디까지나 여행에 가까울 것이고 그저 시작이 시작에 불과한 경우겠지만, 돌아올 생각일랑 고향땅에 눈물과 함께 고이 묻어두고 편도행 티켓 한 장만 손에 쥐어 먼길 떠난 그 사람의 마음가짐이 비로소 절반을 넘어서는 그 시점이 아니겠는가. 암요. 그 정도는 되어야죠.


..

..


최근 내가 한 그 시작은, 절반이 아니라 시작이었구나(이런). 다시 한번 '자알'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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