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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시작하려면, 어제를 먼저

숙제는 사라지지 않아

by 피터의펜

렘수면에 빠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둠 속에서 누군가 다급히 나를 흔들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다섯 시도 안 된 새벽. 둘째였다.


"아빠, 나 열나는 것 같아. 체온계 있어?"
"어디가 아파?"


이마에 손등을 대보니 정상 체온. 꾀병이라고 단정 짓고 싶진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대충 알았다.


금요일 새벽의 마음. 학교 가기 싫은 그 마음. 침대 끝에 앉아 한참을 얘기했다. 주말까지는 고작 하루 남았는데 금요일이 유난히 길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오늘은 가보자고, 함께 버텨보자고 달래고 또 달랬다.


그날 저녁, 아이가 왠지 모를 자신감에 차서 말했다.


"오늘은 먼저 놀고, 나중에 숙제할래."

평소 같으면 "먼저 하고 놀자"라고 했겠지만,

나도 지쳐 있었고, 아이의 한 주가 어땠는지 알기에 굳이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 계획대로 해봐."


아이는 실컷 놀았다.

밤이 깊어서야 책상 앞에 앉았지만, 결국 숙제는 끝나지 않았다. 문제집은 펼쳐진 채였고, 아이는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다. 나는 아이를 조심히 안아 침대로 옮기며 그 하루의 끝을 대신 정리했다.


토요일 아침.

아이는 평소처럼 블록을 꺼내고 TV를 켜려 했다.


"안 돼. 어제 숙제 아직 안 끝냈잖아."


아이가 멈칫했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근데 오늘은 주말이잖아..."

"맞아, 주말이지. 근데 어제의 일이 그냥 사라지는 건 아니야. 어제 못 한 건 오늘 먼저 마무리하고, 그다음에 오늘을 시작하자."


아이는 속상해했다. 억울한 눈물이 맺혔다.

알고 있다. 이 감정은 아직 아이에겐 커다랗다.

그래도 그 감정을 ‘책임을 미뤄도 되는 이유’로 덮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건 언젠가 더 큰 미루기가 되어 돌아오니까.


"미뤄진 일은 사라지지 않아."


나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어제 안 했던 일은, 결국 오늘의 맨 앞에서 우리를 기다려."


한참을 망설이던 아이가 투정 부릴 마음을 접고 책상에 앉았다.


수학 세 장, 영어 두 장.
문제를 하나 넘길 때마다 아이의 표정이 조금씩 풀렸다. 마지막 문제에 동그라미가 그려졌을 때, 아이가 작게 말했다.


"끝."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끝까지 끝냈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별다른 저항도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좋아. 끝냈으니 이제 오늘을 시작하자. 아빠랑 블록놀이 같이 하자."


나도 하던 일을 바로 내려놓고 아이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아이의 어깨는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놀이는 더 달콤해졌고, 주말은 비로소 시작됐다.


그날 나는 알았다.

단호함이란 화를 내는 방식이 아니라,
순서를 지켜주는 사랑이라는 걸.

그리고 아이는 몸으로 배웠다.
미뤄진 하루는 사라지지 않고, 마주 서면 줄어든다는 걸.


아빠의 부록 조언


미루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그걸 마주하고 다시 시작하는 건,
조금 더 용기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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