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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an 13. 2019

9장 Ⅲ근세

14세기 르네상스 ~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모형도


3-1. 근세Early modern (14세기-1789년)


신에서 다시 인간으로

철저하게 기독교 중심이었던 중세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인간 중심의 시대로 돌아가는 근세가 시작된다. 근세는 보통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14세기부터 왕과 귀족의 몰락을 가져온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까지 약 400년 정도의 기간을 말한다. 근세는 중세와 근대의 중간이라는 뜻인데 서양사에서의 Early Modern을 의역해서 사용하는 말이다. 사실 Modern이라는 단어가 서양사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정확히 대응하는 단어는 동양에는 도저히 찾을 수 없으므로 근세로 의역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에 가깝다. 

중세가 끝나고 근세로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사회 권력 구조만 보면 두 시대를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중세나 근세나 똑같이 왕과 귀족이 통치하고 있었고 기독교 또한 여전의 서양의 중심 종교라는 점은 변함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와 근세를 동시에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면 근세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중세는 기독교가 징벌과 속죄를 강조하는 종교인만큼 뭔가 무겁고 어두운 느낌을 주는 반면, 근세는 르네상스의 예술 들이나 뉴턴의 물리학과 같은 근대 과학의 업적들이 떠오르니까 인간 사회가 진보하기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뭔가 밝아지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8~99>

모던Modern의 시작, 르네상스Renaissance

근세가 시작하는 시점은 보통 르네상스 시대부터로 본다. 중세에서 근세로 진입하는 것의 핵심은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이런 인간 중심의 시대정신, 즉 '인본주의Humanism'는 르네상스 시대에 다시 깨어나기 때문이다. 왜 인본주의가 '다시 깨어 난다'라는 표현을 쓰냐 하면, 다시 깨어난다는 것은 누가 죽거나 잠을 자고 있었어야 다시 깨어날 수 있는 것인데, 르네상스는 중세 천년의 기간 동안 잠들어 있던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 정신’을 다시 깨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Renaissance라는 말 자체가 Re-birth,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기독교는 르네상스와 그 이후 지금까지도 서양의 중심 종교로 남아 있으니까 그리스 로마의 종교까지 부활한 것은 아니다. 다시 깨어난 것은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정신, 인간의 권리를 중요시하고 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인본주의와 합리주의이다. 


인본주의와 합리주의

근세의 시작점이 되는 르네상스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데, 이때 태어난 인본주의와 합리주의는 계속 이어져 여전히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과 현대를 사는 우리들 사이에는 분명 600년 이상의 시간차가 존재하지만 아직도 인본주의와 합리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시대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본주의와 합리주의는 무엇을 의미할까. 인본주의와 합리주의는 철학적으로는 진리를 성경이 아닌 인간의 이성을 통해 찾는 태도를 말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입장에서는 별로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정신의 변화는 실생활에서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가장 쉬운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로마의 수도시설이다. 현대인들은 가정집에 수도시설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수도시설은 로마인들의 유산이다. 도시 문명이 발달하면 사람들이 밀집하게 되고 자연히 위생문제가 생기기 쉬운데 로마인들은 수도시설을 정비하는 것으로 쾌적한 도시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도시발달→인구 포화→위생 악화→수도 건설이라는 아주 심플하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근대에 와서야 완성된 상하수도 시설이 고대에 이미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리스 로마의 사람들이 '인간다운 생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인간다운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야말로 '인본주의'다. 반면 중세에는 이런 문명생활을 오히려 세속적이고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살아가더라도 기도와 수도로 점철된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고귀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은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사고방식이지만, 이 사고방식은 중세에 사라졌다가 르네상스에 다시 복원된 것이다. 물론 르네상스가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세상이 바뀌거나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근세의 정치 시스템은 왕정이었고 유럽 전역에 마녀사냥과 같은 비합리가 남아 있었지만,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의 역사나 학문이 다시 복원되고 거기서부터 유럽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하게 된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원인

그렇다면 르네상스는 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르네상스가 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 똑 부러지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은데 어떤 큰 사건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중세가 붕괴하는 가운데 여러 사건들이 겹쳐지며 서서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동로마제국Byzantine Empire이 멸망일 것이다. 서로마는 476년 북방 야만족에 의해 멸망했지만 동로마는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에도 중세의 천년 동안 살아남았는데 덕분에 14세기에도 여전히 '로마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4차 십자군 원정 때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가던 십자군이 엉뚱하게 동로마를 공격하면서 동로마는 멸망하게 된다. 이때 동로마의 갈 곳 없는 지식인들이 서유럽 쪽으로 건너오게 된다. 이 동방에서 건너온 로마 지식인들에 의해 중세인들은 다시 '로마적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외에도 흑사병의 창궐이나 피렌체나 베네치아, 밀라노 같은 도시문화의 발달, 교황권의 약화 등 르네상스의 탄생에 영향을 준 여러 사건들이 있었지만 결국 르네상스는 무너져가는 중세 속에서 탄생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르네상스의 이미지

르네상스는 사건이 아닌 시대 변화의 흐름이다. 때문에 르네상스가 무엇인지 이미지로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미술사 책이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르네상스의 이미지를 가장 떠올리기 좋은 것은 르네상스의 예술들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다비드'상, '천지창조'와 같은 작품들이 르네상스의 대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이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변화를 모두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중세의 다소 어두운 종교적 예술에서 르네상스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술들로의 바뀌는 것은 변화하는 시대의 분위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이후 근세를 결정짓는 사건들

르네상스는 시작에 불과하다. 르네상스 이후 의식이 깨어난 사람들이 수 백 년간 점차 만들어 나간 시대가 근세다. 그런데 이 근세 사회로의 발전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건들'이 겹쳐지면서 완성되는 느낌에 더 가깝다. 이 '사건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발표, 루터의 종교개혁,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 발명,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뉴턴의 만유인력 발견, 영국의 산업혁명처럼 적어도 이름은 들어본 유명한 사건들이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마치 벽돌이 하나둘씩 쌓여서 집이 완성되는 것처럼 근세, Early modern을 완성시켰다. 이 근세의 사건들 중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몇 가지를 시대 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묘사한 인쇄물, 위에 Christi와 Anti-christi라고 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루터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예수와 사람들의 숭상을 받는 교황의 모습을 대조시켜 가톨릭의 타락을 강조하였다.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까지 표현하였으니까 교황은 아마 화가 단단히 났을 것이다>


1. 구텐베르크와 종교개혁 (활자 발명-1440년경, 종교개혁-1517)

우선 근세에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보면 활자의 보급일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의 발명은 이후 지식세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수도승들의 주된 업무 중 하나는 필사였는데, 필사는 고대문서나 성경 등을 손으로 일일이 양피지에 옮겨 적는 작업을 말한다. 필사된 성경 한 권은 당시 기준으로 집 몇 채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고 하니까 중세의 지식 세계는 돈과 힘이 있는 교회에 편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개발한 이후부터는 보통 사람들도 성경이나 책들을 통해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 정보의 확장은 사람들의 의식이 깨어나도록 만들었고 이후 역사를 바꾸어 놓는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으니까 지금도 구텐베르크의 업적을 누리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은 가톨릭 교회에서 면죄부를 팔면서 시작되었다. 면죄부는 돈으로 천국의 입장권을 살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성경 교리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다. 마틴 루터는 가장 먼저 성경을 인쇄하여 보급시켰다. 성경의 보급은 말하자면 가톨릭만이 독점하고 있던 '정보'를 대중에게 개방시킨 것인데 가톨릭 권력이 유지되었던 것에는 성경이라는 '정보 독점'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통찰했던 것이다. 또 가톨릭에 저항한 95개 조항의 반박문이나,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묘사한 인쇄물 등은 수 만장씩 복제되어 마을에서 마을로 사람들에 의해 퍼져나갔고 이것이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만약 인쇄기술이 없었다면 인쇄물을 수 만장씩 손으로 그리거나 쓰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테니까 종교개혁이 충분한 동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별로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인쇄기술과 종교개혁은 이렇게 연결되어있다.

이때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천주교에서 분리된 종교가 한국에서 보통 기독교로 통칭되는 개신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이다. 프로테스탄트는 저항하다Protest에서 나온 말인데 저항해야 할 대상은 물론 중세의 가톨릭이다. 이 기독교는 당시의 신흥세력인 자본가들과 결탁하면서 근세의 새로운 종교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다.      


2. 신대륙 발견 (1492)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기점을 476년 로마 멸망으로 보는 것처럼 학자들은 중세와 근세를 구분하는 어떤 정확한 시점을 찾고 싶어 한다. 앞서 르네상스를 중세와 초기 근대를 구분하는 기점으로 본다고 이야기했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근세의 출발점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신대륙 발견이 르네상스와는 달리 정확한 연도를 특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근세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대륙의 발견은 단순히 유럽인들이 거대한 미국 대륙을 발견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신대륙의 발견이 상징하는 것은 지중해 유럽 땅에 갇혀서 수백 년 동안 자기들끼리 계속 싸우기만 하던 유럽인들이 유럽 밖의 세계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 소위 대항해시대로 불리 우는 근세의 개척시대는 미 대륙을 포함하여 인도, 아프리카, 그리고 멀리는 중국과 일본 등의 아시아까지 진출하며 유럽인들의 시야를 넓히게 된다. 본격적인 '서양의 세계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3. 과학의 탄생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1543뉴턴의 프린키피아 발간 1687)

현대인에게 익숙한 '과학적 사고방식'은 근세에 나타나 지금까지도 지배적 세계관으로 군림하고 있다. 근세 과학발전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아마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발표와 뉴턴의 물리법칙의 발견 일 것이다. 보통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하면 완전히 사고의 틀을 바꾸어 놓는 혁신적인 변환을 뜻하는데, 이 말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그만큼 혁신적이었기 때문이다. 

1543년, 독일에서는 한참 종교개혁이 진행 중인 시점에 지동설이 발표되었다. 지동설은 간단히 말하면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말인데, 그전까지 사람들은 지구가 중심이고 그 주변을 태양과 달과 별들이 돈다고 생각했다.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전 우주의 주인이라는 기독교적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 신이 인간과 인간이 살 땅인 지구를 창조했고 그 '주변기기'로써 해와 달과 별들을 달아놓았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세계관은 지금 생각해봐도 그럴듯한 생각이다. 하지만 지동설의 발견은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고작 태양 주변을 도는 여러 행성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처음 깨우쳐 준다. 

이 발견은 사람들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된다. 과거에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인간은 우주라는 거대한 세계에서 작은 모래 같은 존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후 사람들은 성경이 아닌 관찰과 실험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하는데 이 사고방식이 과학적 사고방식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뉴턴의 중력 방정식, 이 공식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주의 거대한 천체들의 운동을 이 단순한 공식 하나로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세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는 아마 아이작 뉴턴일 것이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뉴턴은 만유인력 외에도 빛, 관성, 가속도 등 우주를 물리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과학자였다. 뉴턴이 발견한 물리 법칙들은 우주에서 천체들이 움직이는 방법을 수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물리 법칙들이 '신의 언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중력을 기술하는 공식은 위처럼 간단하지만, 이 간단한 하나의 공식은 우주의 모든 별들과, 은하와 같은 거대 천제들의 움직임을 똑같이 통제하는 공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와 뉴턴 외에도 다른 근대 과학자들의 업적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수많은 근대의 과학자들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과학법칙들과 물리 법칙들을 하나둘씩 발견했다. 과학의 발전은 근세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였다.


근세Early Modern도 모던Modern이다

이렇게 근세에는 여러 사건들이 계속 발생하면서 점차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과 가까워지게 된다. 신의 권능에 꽉 붙잡혀있던 중세에서 탈출해서 인본주의의 시대를 조금씩 완성시켜 나가는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근세가 아무리 새로운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귀족들이 말을 타고 다니고, 화려한 귀족 의복을 차려입고, 고전음악의 관현악 연주를 듣던 시대인데, 어떻게 컴퓨터가 보편화된 지금 시대와 같이 모던Modern으로 묶는 것일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는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활자로 인해 책을 읽고 있고,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기독교가 우세한 시대를 살고 있으며, 대항해시대에 만들어진 세계지도를 가지고 세계사를 공부하고 있고, 뉴턴의 물리법칙과 미적분을 여전히 고등학교에서 배우고 있으니까 근본적으로는 비슷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근세 역시 모던modern이다.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리심’, 1612–1614, 근세의 미술들은 위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적인 회화’가 주류를 장악하고 있다>



3-2. 근세의 미술, 명화들의 시대


명화들의 시대

근세의 미술은 쉽게 말해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사실적인 회화들, 즉 '명화들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근세의 사실적인 회화의 흐름은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로부터 출발하여(1400년대 중반) 인상주의 이전까지(1870년대)의 약 400년간 이어지게 된다. 이 고전 미술은 다시 매너리즘, 바로크, 로코코, 장르 회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등의 여러 가지 예술 사조들로 구분할 수 있다. 각 사조를 발전시킨 예술가들은 엎치락 뒤치락을 반복하며 나름대로 예술을 발전시킨 것이었지만 이 책에서는 큰 관점에서 이 모두를 '사실적인 유화 그림'이라는 하나의 묶음으로 볼 것이다. 우선은 큰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시스틴 성당 천장화의 한 부분), 1512>

유럽의 명화European Paintings의 출발점르네상스

'명화들의 시대'를 연 것은 지오토 디 본도네라는 화가, 그리고 그 뒤 이어진 르네상스의 3대 거장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들이 잠들어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부활시키려고 했던 것처럼, 르네상스의 예술가들 역시 고대의 그리스 로마의 미술들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이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본받고자 했던 그리스 로마의 미술은 기본적으로는 인체와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미술들이다. 이는 중세의 미술들이 상징적이거나 추상적이었던 것과 구분되는 지점인데, 위의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나타나는 것 같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사실적인 미술들을 부활시킨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고 있노라면 고대의 미술을 단순히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이를 초월하여 훨씬 더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렸다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어쨌든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을 부활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미술에서의 과학적 사고 

근세가 합리주의로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술에서도 합리적 사고방식과 과학적 사고방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는 유럽의 명화들을 보며 그저 '잘 그렸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여러 과학적인 이해와 방법들이 필요하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단순히 감각만 가지고는 '사실적으로 잘 그린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원근법, 소실점, 그리고 해부학과 같은 과학적 기법들을 연구하였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수십구의 시체를 해부하고 해부학에 관한 노트를 남긴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술에 공식적인 교육이 생겨난 것도 이 시점부터 이다. 중세에서 미술교육이라고 하면 유명한 장인의 수제자로 들어가서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 정도였을 테지만 르네상스 이후부터는 미술도 다른 학문들처럼 체계적 교육이 필요한 일종의 '학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중세에 미술을 따로 교육하지 않았던 이유는 미술을 학문의 결과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광기의 산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에서 여러 회화기법이나 조각기법들이 이론적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고, 이를 가르칠 필요가 생기면서 정식 학문으로써의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이렇게 미술에서도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체계적인 이론과 방법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사실적인 회화의 흐름, 보통 유러피안 페인팅European Paintings이라고 하는 유럽 고전 회화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유럽의 명화들은 수가 많다

파리의 루브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 가은 세계적인 미술관에 가게 되면 전시목록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유럽의 명화들European Paintings이다. 근세는 비교적 현대와 가깝기 때문에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르네상스 이후 수백 년 동안 탄생한 작품 수 자체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 보통 사람들이 '교양으로써의 미술'을 접하게 될 때 가장 관심을 가지는 시대가 이 유러피안 페인팅, 유럽의 명화들인데, 이는 무엇보다 이 시기의 미술들이 시각적으로 매우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르네상스 천재들의 존재감 

그런데 근세의 미술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가장 독특한 것은 르네상스의 천재들의 존재감이다.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근세의 출발점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후대의 미술들을 압도하는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예술들을 창조해 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천재성을 뛰어넘는 예술가가 이후 수백 년 동안 과연 있었느냐를 물어보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후대의 예술가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높은 벽 같은 존재들인 것이다. 

이 후대 예술가들이 느꼈을 르네상스 천재들에 대한 질투심은 '매너리즘'이라는 굴욕적인 미술 사조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르네상스 다음에 나타난 매너리즘이라는 미술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 이유는 르네상스의 천재들을 형식적으로 따라 하려고만 하다 보니 기교만 화려할 뿐 오히려 예술적 깊이는 떨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대에도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표현은 본질을 잃어버리고 의미 없는 행동만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매너리즘 시대의 예술가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술사에서 족적을 남긴 수많은 바로크의 화가들, 예컨대 카라바죠, 루벤스, 푸생, 벨라스케스 같은 수많은 후대의 화가들은 르네상스의 천재들을 자신들의 롤 모델로 생각하고 평생 이들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하였다. 심지어는 19세기의 화가들, 예를 들어 들라크루아나 제리코 같은 비교적 근대에 가까운 화가들도 여전히 피렌체나 로마에 여행을 가서 르네상스의 천재들의 회화에 깊은 영향을 받고 돌아와서는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가기도 했다. 또 근대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인 로뎅도, 로뎅 자신은 19세기에 활동했지만 15세기에 활동하던 미켈란젤로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아무리 천재들이라고 해도 사후 400년 동안 후대의 예술가들에게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은 너무한 게 아닐까 싶지만 그만큼 근세의 미술에서 르네상스의 천재들의 영향력은 컸다. 다르게 표현하면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수백 년간 유럽의 예술을 위에서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명화들왕과 귀족들을 위한 미술

중세와 근세의 가장 큰 차이는 '신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인데 이 경향은 미술에서는 예술의 소비자가 '신'에서 '인간'으로 변화하는 것으로도 나타나게 된다. 중세의 예술가들이 신을 위한 미술을 만들었다면 근세의 예술가들은 왕과 귀족들이라는 '인간'들을 위한 미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소비자인 '인간'들은 왕과 귀족 같은 상류계층은 사람들로 한정되어 있었다. 아직까지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홀바인, 벨라스케스, 푸생, 루벤스, 고야 등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을 꼽아보면 전부 궁정 화가 출신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장들 외에 수많은 다른 평범한 예술가들도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그들의 초상화등을 그리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렇게 보면, 유러피안 페인팅European Paintings은 '왕과 귀족을 위한 미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09-1511, 가운데 플라톤은 하늘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왕과 귀족을 위한 미술, 귀족의 초상화, 성경, 그리스 로마

왕과 귀족들이 원했던 미술은 자신들의 왕궁과 대 저택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크게 세 가지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귀족의 초상화, 성경 이야기, 그리고 그리스 로마 이야기다. 

근세는 귀족 중심의 시대니까 귀족의 초상화가 많은 것은 당연하고, 유럽의 종교는 가톨릭과 개신교였으니까 성경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런데 근세에 그리스 로마의 이야기들도 자주 그려졌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위의 '아테네 학당'의 경우 1511년에 완성되었는데, 그림 속의 인물들은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피타고라스나 유클리드 같은 수많은 고대의 철학자들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의 철학자들을 그린 것은 조금 이상하다. 이 그리스 철학자들이 살던 시대는 기원전 4-5세기니까 르네상스로부터 대략 2000년 전의 철학자들을 굳이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현대의 어느 한국의 화가가 갑자기 1500년 전의 원효대사 초상화를 그린다면 이상하지 않을까. 

유럽의 명화들에 이렇게 과거의 그리스 철학자나 그리스 신화 이야기, 또는 로마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 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르네상스 특유의 분위기를 이어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 강조했던 것처럼 르네상스는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부활하려고 한 사상이다. 때문에 미술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인물이나 사건에 관한 내용들이 미술로 같이 부활한 것이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1656, 왕녀의 초상.  뒤쪽의 거울에 희미하게 왕과 왕비의 모습이 보인다.>


권력으로부터 탈출하기 시작하는 예술

이렇게 왕과 귀족에게 묶여있던 예술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시대가 갑자기 변혁의 물결을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그 변혁은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이다. 이 두 사건은 사회의 핵심 권력을 전복시킨 사건인데 종교개혁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종교권력을, 시민혁명은 왕과 귀족 등의 정치권력을 전복시켰다. 이런 시대변화에 따라 예술도 같이 달라지게 된다.


미술과 거리가 먼 기독교

우선 종교개혁은 전통적인 가톨릭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기독교를 탄생시켰다. 가톨릭은 근세에도 여전히 사회의 중요한 기득권 세력이었다. 우리는 성직자라고 하면 소박한 수도승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왕 바로 다음의 제1 귀족 계급이 일반 귀족이 아니라 성직자 계급이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가톨릭이 루터에 의해 전복되는 사건이 종교개혁이었고 종교개혁의 성공은 개신교를 유럽의 새로운 주류 종교로 등장시키게 된다. 

문제는 주류 종교로 등장한 개신교는 천주교와 달리 미술과 거리가 매우 멀었다는 것이다. 특히 칼뱅 이후 등장한 청교도들은 기본적으로 낭비와 사치를 배격하고 근면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교회 장식을 위한 제단화조차 불필요한 사치라고 생각했다. 이는 중세의 미술이 교회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것과 대비되는데 근세의 후반으로 갈수로 소위 '성화'라고 부르는 종교화들이 줄어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현대 교회에도 화려한 그림이나 조각이 거의 없는데 이런 분위기는 이 청교도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이렇게 '사치를 멀리하는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예술가들은 점차 설 자리를 잃고 벌이도 줄어들게 된다. 그 위대한 미켈란젤로조차 교황의 후원 없이는 예술활동을 이어나가기 어려웠으니까. 

  


<루벤스의 '파리스의 심판' 1636,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미술과 권력을 분리시키는 시민혁명

두 번째의 변혁은 시민혁명이다. 1789년 시민혁명은 근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니까 다음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먼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 시민혁명이 예술을 종교권력에 이어 세속 권력으로부터도 분리시켰다는 것이다. 

근세의 미술은 강조했던 것처럼 대부분 왕과 귀족에 귀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민혁명이 발생하면서 왕과 귀족의 권력은 시민들에 의해 전복되었고 자연스럽게 예술가들도 그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달라지는 미술의 주제들

시민혁명 이후 미술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까. 나타난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는 '주제'의 변화다. 위 두 그림은 유럽의 명화라는 점에서 특별히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분명 주제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왼쪽의 루벤스의 그림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근세 회화의 가장 일반적인 주제 중 하나였던 그리스 신화를 그린 것이다. 귀족을 위한 그림이다. 하지만 오른쪽의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시민들이 왕과 귀족을 짓밟고 나아가는 혁명적인 주제를 그렸다. 당연히 왕이나 귀족들이 자신들을 짓밟고 나아가는 그림을 주문했을 리는 없을 텐데, 예술이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변화의 시작

종교개혁과 시민혁명은 결국 예술가들을 전통 권력으로부터 분리시켰고, 이제 예술가들은 스스로 살길을 개척해야 하는 시대가 가까워지게 된다. 예술가들이 전통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예술가들을 황량한 들판으로 내몬 것이기도 하다. 교회와 귀족의 지원이 없어지고 나면서 현실적인 삶은 점차 고달파졌기 때문이다. 근현대의 예술가들이 주로 가난했던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예술적 자유도는 훨씬 높아졌다. 그리고 이는 미술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다. 그 변화의 시작은 낭만주의부터였고 그 끝에 나타난 미술이 인상주의Impressionis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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