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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an 13. 2019

10장 Ⅳ근대

1789년 시민혁명 ~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료


<1793년 광장에서 처형당하는 루이 16세, 프랑스 판화, 조선왕조의 역사에서 왕이 백성들에 의해 목이 잘리는 사건을 상상할 수 있을까?>

4-1. 근대(1789년 시민혁명 ~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료)


시민의 시대

근대는 쉽게 표현하면 역사의 주인이 '왕과 귀족'에서 '시민'으로 이동한 시대이다. 과거 그 어느 시대에도 평민이 시대의 주인공 인적은 없었으니까 이것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봐도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변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는 영어의 후기 모던Late Modern을 의역한 말이다. 근대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시대상은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지도자를 뽑기 시작하고 자동차나 텔레비전 같은 근대 과학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가는 시대이다. 지금도 큰 관점에서는 비슷하므로 현대와 합쳐서 근현대로 묶어서 부르기도 한다.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근대의 시작은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이다. 개인적으로 서양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두 가지만 꼽아보라고 하면 아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프랑스 시민혁명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 두 사건은 모두 시대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1789년 인권선언을 시작으로 프랑스 시민들은 혁명을 일으켰고, 1793년 자신들의 지도자인 국왕 루이 16세를 끌어내려 광장에 수많은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목을 자르게 된다. 당시 스페인이나 독일 같은 주변 국가의 왕들도 급사를 통해 '프랑스 국왕의 목이 평민들에 의해 잘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이 프랑스 시민혁명은 사회 질서를 구조적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는 역사 이래 줄곧 왕과 귀족 같은 지배계층과 평민이나 노예 같은 피지배계층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렇게 계급이 계속 고착화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는 아시아나 유럽이나 아프리카나 거의 모든 인류 문명권이 비슷한데, 인류는 시민혁명을 통해 인간이 본질적으로 모두 평등하다는 사고방식을 처음 갖기 시작한 것이다. 1789년 시민혁명을 통해 공표된 '인권선언'은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선언이다. 인권선언은 그저 학교 시험을 위해 외워 두어야 하는 세계사 상식이 아닌, 수천 년의 인류 계급사를 바꾸어 놓은 가장 혁신적인 사건인 것이다. 

프랑스 시민혁명은 앞의 '시민'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평범한 시민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유럽 사회에서의 계급을 구분해 보면 전체 인구의 약 2% 정도는 왕과 성직자와 귀족들이고, 나머지 98%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리고 이 다수의 평민들은 다시 자본가(부르주아)와 노동자(프롤레타리아)로 구분되는데 평민 계급 중 능력 있는 사람들은 자본가로 올라서고 보통 사람들은 노동자로 남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재벌같이 돈 많은 부르주아야 말로 진짜 귀족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원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부르주아도 어디까지나 평민 계급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의 능력 있는 보부상이 중국을 오가며 아무리 많은 부를 쌓았다고 해도 양반들이 보기에는 어디까지나 상놈에 불과한 것과 비슷하다. 

이 부르주아들은 쌓인 부를 통해 귀족에 준하는 교육도 받고 교양도 쌓았지만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귀족보다 낮은 계급이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 계급들은 귀족들의 착취와 국가의 과도한 세금 때문에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궁핍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결국 부르주아와 노동자가 결탁하는 것으로 1789년의 프랑스 시민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새로운 시대 – 시민의 시대

하지만 단순히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어난 것만으로 사회 전체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은 여전히 왕정이었고, 심지어 혁명이 일어났던 프랑스의 경우도 혁명이 일어난 지 불과 10년 만에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로 다시 등극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황제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1789년 시민혁명 이전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혁명이 일어난 뒤에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다. 이는 유럽 사회가 혁명 이후로도 민주주의로 쉽게 정착하지 못하고 여전히 혼란스러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결국 시대의 큰 흐름은 세상이 시민중심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도 여러 혼란 이후 결국 현대적인 민주제도로 정착하게 되었고, 또 유럽의 다른 여러 국가들도 시민혁명에 영향을 받아 '각자 나름의 혁명'을 완성하게 된다. 국가마다 선택한 혁명의 방법과 정치제도는 다르지만 그것이 내각제든 대통령제든 근본적으로 시민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의 시대로 향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영국의 방적기계의 발달, 1733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보통 산업사회로 진입할 때 가장 먼저 발달하는 산업이 섬유산업이다. 공화정에 가까웠던 르네상스의 피렌체도 섬유산업이 일찍이 발달하였다>


영국의 산업혁명

이것이 필연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은 비슷한 시기에 발생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은 시민혁명과 함께 근현대인의 삶의 형태를 바꾸어 놓았다. 

증기기관의 발명 이후 공장이 발달하면서 노동자들은 시골에서 도시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근대 도시문화를 형성하였다. 노동자들은 자동차나 세탁기 근대 문명의 이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을 위한 영화나 라디오 같은 대중문화도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사실 영국은 프랑스보다 먼저 혁명이 일어난 나라였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101년 전인 1688년,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명예혁명'으로 불리는 혁명을 통해 영국은 가장 먼저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였다. 다만 역사책에서는 보통 그 역사적 의미와 파급력 때문에 프랑스 시민혁명을 영국의 명예혁명보다 더 강조할 뿐이다. 

유럽 국가들 중 영국에서 가장 처음 산업혁명이 시작했던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가장 먼저 민주제도를 완성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민주적 정치제도에서는 자유로운 시민계급이 나타나고, 이 자유 시민계급이 개개인의 의지와 욕망을 발현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시장과 산업이 발달하였다는 것이다. 

영국이 일찍 민주적 정치제도를 완성시킨 것은 미국의 탄생과도 연결된다. 미국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선 영국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면서 탄생시킨 나라인데 독립전쟁을 통해 1783년 영국 본토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그리고 묘하게도, 프랑스 시민혁명과 같은 해인 1789년에 미국의 첫 대통령으로 조지 워싱턴을 선출한다. 유럽 대륙에서는 프랑스가 이제 겨우 시민혁명을 이루어 냈는데 같은 해에 미국에서는 첫 대통령이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미국이 빠르게 민주제도를 안착시킨 것은 모국인 영국이 이미 백여 년 전에 가장 먼저 민주적 정치제도를 완성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완성된 근대Modern세계

유럽은 이렇게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각 국가마다 혁명과 투쟁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완성시키게 된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이 서양이 만들어낸 '새로운 세상'은 유럽의 식민 정책을 통해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다. 물론 이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많은 민족들이 수탈당하고 죽는 비극도 있었지만, 긍정평가나 부정 평가를 떠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서양이 전파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벤스의 '성모자화'1630, 모네의 '루앙성당' 1894,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하는 그림들>


4-2. 근대의 미술, 시민을 위한 미술


근대 미술Modernism Art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미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미술은 항상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해 왔다. 그렇다면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변화 역시 어떤 식으로든 미술에 변화를 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근세의 사실적인 회화의 흐름은 시민혁명 이전까지 거의 400년간 이어져왔다. 이 유럽의 명화들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그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장에서 설명한 인상주의부터였다. 그렇다면 인상주의의 탄생과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은 어떤 연결점이 있는 것일까. 

인상주의는 2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빛을 그린다'는 아이디어로 그려진 미술이다. 얼핏 생각하면 '빛을 그리는 그림'과 '시민혁명'사이에는 전혀 연결점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인상주의의 탄생 과정을 자세히 추적해 들어가 보면 인상주의는 정확하게 시민혁명의 여파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민혁명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빛의 화가들'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자. 


인상주의의 태동

시민혁명은 1789년이었고 인상주의는 1870년대에 탄생했으므로 둘 사이에는 대략 80년 정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이 80년의 기간은 말하자면 인상주의의 탄생을 예고하는 '인상주의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낭만주의Romanticism와 사실주의Realism가 먼저 등장하였다. 이 두 사조는 이후 인상주의가 탄생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인상주의의 탄생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우선 이 두 사조를 이해해야 한다.

   

              

<프리드리히의 ‘얼음바다' 1823, 컨스터블의 ‘건초 마차' 1821,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낭만주의Romanticism

우선 혁명 이후 가장 먼저 나타난 사조는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는 형식적으로만 봤을 때는 고전시대의 회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낭만주의도 어쨌든 사실적으로 잘 그려진 유화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바뀌기 시작한 것은 내용이다. 고전 회화가 그리스 신화나 성경 이야기처럼 귀족의 요구에 맞는 주제들을 그렸다면 낭만주의부터는 전혀 다른 주제들이 그려지기 시작한다. 위의 세 그림은 낭만주의의 대표 화가들의 그림인데 주제를 살펴보면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프리드리히는 얼음바다라는 대자연의 풍경을, 영국의 컨스터블은 농촌의 생활을, 그리고 프랑스의 들라크루아는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렸다. 같은 낭만주의로 분류하지만 주제를 보면 딱히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예술가들이 각자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 느낌에 가깝다.

다양성은 낭만주의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다. 혁명의 바람이 불 때 '왕과 귀족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예술가들이 각자 흩어져서 스스로 그리고 싶은 주제를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찾아낸 주제들이 다양한 것은 당연하다. 개개인이 욕망하고 추구하는 바는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농촌 풍경이든 자연 풍경이든 아니면 혁명이든, 귀족의 요구와 상관없이 각자 개인의 관심에 따른 다양한 주제들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으로 비교해 보면 모차르트를 고전주의 음악으로 분류하고 베토벤을 낭만주의 음악으로 분류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두 작곡가 모두 형식적으로는 교향악이나 협주곡 같은 전통 클래식의 형식으로 작곡했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모차르트는 궁정 음악가로서 오로지 왕과 귀족을 위한 음악들만 작곡했고 낭만주의 작곡가인 베토벤은 '월광'이나 '운명'같은 베토벤 자신이 관심 갖는 주제로 작곡했다. 형식은 같지만 주제가 바뀐 것이다.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낭만주의

덧붙이자면 낭만주의의 그림들은 '낭만적인 공통점'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낭만주의는 '낭만Romantic'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남녀 간의 사랑 같은 주제를 떠올리기 쉬운데 실제로는 전혀 그런 주제를 다루지는 않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낭만주의라는 말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분야는 문학 쪽이었는데, 이런 말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엄격하고 딱딱한 고전 문학Classic과 혁명 전후로 등장한 새로운 문학을 구분할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혁명 이후의 나타난 새로운 문학들은 로만Roman어로 쓰인 중세 기사문 학과 내용이나 다루는 주제가 유사했기 때문에 Romanticism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문학에서 먼저 낭만주의라는 말이 정착한 이후 미술이나 음악 쪽에서도 차용되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니까 정확히 맥락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술 쪽의 낭만주의도 그것이 대자연의 아름다움이든 아니면 시골의 한적한 풍경이든 어쨌든 낭만적인 측면은 있으니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밀레의 '만종(기도를 드릴 때 치는 종)' 1857>

                        

사실주의Realism - 평범한 시민을 그린 그림

이렇게 낭만주의가 다양한 주제를 찾기 시작하는 가운데, 그중 일부의 화가들이 평범한 서민의 삶을 직접 관찰하여 그대로 그리기 시작하였다. 이 사조가 사실주의Realism이다. 사실주의는 사실적으로 매우 잘 그렸기 때문에 사실주의가 아니라, 서민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리얼Real하게 그렸기 때문에 사실주의이다.(이는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현실주의'로 번역하는 게 더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위 그림은 밀레의 '만종'으로 사람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사실주의 그림이다. 밀레의 '만종'은 결코 귀족을 위한 그림이 아니다. 귀족 입장에서는 굳이 서민들이 지저분하게 흙 묻혀가며 밭 가는 풍경을 봐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서민들을 그린 그림들이 탄생한 것은 시민 혁명의 여파가 이제는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낭만주의보다 더 강한 탈귀족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 1851, 서민의 장례식을 묘사하였다>


사실주의의 특징 - 내용의 문제

사실주의의 특징은 진짜 말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밀레와 함께 사실주의의 대표화가인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을 보면, 어느 소시민의 장례식을 마치 사진기로 찍은 것처럼,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담아서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는 장례식에서 잡담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아빠에게 떼쓰는 듯한 아이와 같이 특별히 의미 없는 사람들의 모습도 모두 그려져 있는데, 이는 실제로 그 상황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그대로 그린 것이다. 눈에 보여서 그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고전회화는 사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다기보다는 마치 연극처럼 어떤 상황을 설정해 놓고 그렸다. 그림 내의 인물들에게 연극처럼 각자 역할을 주고 그 연출된 상황을 그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할이 없는 인물은 굳이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사실주의에서는 그림 내의 구성이나 역할 같은 것과 상관없이 서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에 더 의미를 두었다. 

한편 이 평범해 보이는 사실주의의 그림들은 당시 기득권들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충격적인 그림이다. 우선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서민들의 장례식은 그림으로 남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유명하지도 않은 서민의 장례식을 왜 그림으로까지 남겨놓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그림의 크기도 너무 크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이다. 이 '오르낭의 매장'은 3m X 6m의 크기로 그려져 있는데 보통 고전회화에서 이 정도로 그림을 크게 그리는 것은 왕의 대관식이나, 교황 즉위식같이 시대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고작 평범한 서민의 장례식 그림을 저렇게 크게 그려놓은 것이다.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도마'1601-1602, 마네의 '발코니' 1868–1868>

               

내용을 따라가는 형식

그런데 이렇게 사실주의에서 서민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으로 결정하고 나면, 그리는 방법도 갈수록 '있는 그대로 그리는 방식'으로 쫓아가게 된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이는 고전시대의 회화들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보통 고전시대의 화가들은 그림을 아름답고 호소력 있게 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러 가지 효과를 더하거나 빼서 그렸다. 예를 들어 왼쪽의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확실한 입체감을 주기 위해서 왼쪽에 '가상의 조명'이 있다고 가정해놓고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실제 현실에서 저 상황을 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저 정도까지 명암의 대비가 심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빛은 한쪽이 아닌 사방에서 튕겨져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전 화가들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보이는 그대로'를 그린 것이 아니라 빛을 '계산하여' 그렸다. 이를 사진으로 비교해 보면 사진기사가 스튜디오에서 왼쪽에서 조명을 팍 하고 터뜨리면서 사진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빛을 계산해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그림도 빛을 계산해서 그린 것이다. 

반면 오른쪽의 마네의 '발코니'는 이런 '가상의 인공조명'의 효과를 제거시키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렸다. 왼쪽의 카라바조의 그림과 비교해보면 전체적으로 입체감이 떨어져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그림 오른쪽에 꽃 장식 모자를 한 귀부인의 경우, 얼굴이 마치 만화처럼 눈과 코와 입술이 점을 찍어 놓은 것처럼 그려져 있다. 만약 고전 화가 카라바조가 이 여인을 그렸다면 어떻게 그렸을까. 아마 카라바죠는 조명의 방향을 설정해서 눈, 코, 입과 얼굴 한쪽에 확실한 그림자가 나타나도록 그렸을 것이다. 하지만 마네는 그런 가상의 조명 효과를 적용시키지 않고 현장에서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게 된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사진으로 비교하면 조명을 사용하지 않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나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것과 비슷하다. 아마 당시 화가들은 마네의 그림을 보고 '그림을 못 배워서 빛이나 그림자를 계산할 줄 몰랐나 보다'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마네가 의도한 것이었다. 마네는 왜 이렇게 그렸을까?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주의의 주제가 소시민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 시작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앞에 나왔던 '오르낭의 매장'에서 장례식에서 잡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지루해하는 어린아이의 모습까지 모두 그린 것은 눈앞에 보였으니까 '보이는 그대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용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리는 방법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위의 마네가 가상의 조명을 제거시킨 것은 이런 맥락이다. 고전 회화에서는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가상의 조명을 상정해 놓고 그림자와 빛을 계산해서 그렸는데 사실주의에서는 이런 효과를 제거시키고 그냥 눈에 '보이는 그대로'만을 그린 것이다. 즉 내용이 형식으로 전이된 것이다.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로

이렇게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강조한 사실주의에서 인상주의가 탄생한다. 인상주의는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린다'는 사실주의의 강령을 좀 더 발전시킨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주의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렸다면, 인상주의는 좀 더 근본적으로 '눈에 보인다는 것은 결국 눈에 비치는 빛을 보는 것이니까'라는 생각에서 '빛을 그대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인상주의는 이렇게 혁명 이후 나타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거쳐서 탄생한 것이다. 2장에서는 인상주의를 사진기의 발명과 연관 지어서 설명했는데 왜 갑자기 다르게 설명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인상주의의 탄생을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렇게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거치면서 나타난 것이다. 사진기로 설명한 것은 인상주의 탄생을 우선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근현대 미술의 시작, 인상주의

이렇게 인상주의는 시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사건에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그리고 앞서 2장 '이 모든 오해는 인상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상주의 이후 미술세계는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갑자기 수많은 다양한 미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상주의의 탄생 과정을 과정을 곰곰이 살펴보면 미술사는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혁명이라는 정치적 사건은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를 거쳐 인상주의를 탄생시켰지만, 왜 시민혁명의 결과가 '빛을 그리는 인상주의'의 탄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계급 사회를 무너뜨렸다는 것과 빛을 그리는 그림이 탄생했다는 것은 전혀 연관성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후 나타난 현상을 보면 결국 인상주의는 계급사회 붕괴의 현상을 명확하게 미술에 반영시킨다. 인상주의 이후 나타난 가장 중요한 현상은 '다양한 미술들'이 나타는 것이었는데 이는 시민혁명 이후 나타나는 '다양한 시민의 삶'이라는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모네를 포함한 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의 '빛을 그리는 그림'이 이후 미술사에 '다양성'의 흐름을 만들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고 전혀 의도한 바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분야인 미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뿐이지만 자기들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시대를 반영해 버렸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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