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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an 13. 2019

11장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Modernism, Post-modernism


근현대 미술의 구분근대미술과 현대미술

시민혁명 이후 나타난 인상주의와 그 이후의 미술은 '근현대 미술'로 통합해서 부를 수도 있지만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근대미술과 현대미술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 편이다. 예컨대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회화는 가장 대표적인 근대미술Modernism Painting이지만 사람들은 그냥 현대미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근대미술과 현대미술 모두 '시민혁명 이후의 미술들'이라는 관점에서 줄곧 '근현대의 미술'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어쨌든 미술사적으로는 근대 미술과 현대 미술은 구분된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미술은 크게 근대미술과 현대미술로 구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우선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나타난 인상주의와 그 이후의 미술들이 근대미술Modernism Art이다. 이 근대 미술을 다룬 것이 이 책의 5장 모더니즘 페인팅과 6장의 모더니즘의 또 다른 줄기편 이었다. 

한편 현대미술Postmodernism Art은 세계사의 비극이었던 1,2차 세계대전 이후 나타난 미술들을 말한다. 미술사적으로는 5장 모더니즘 페인팅의 마지막에 다루었던 개념미술 이후에 나타난 미술들이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현대미술'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이므로 서양에서 사용하는 Postmodernism Art라는 말이나 Contemporary Art라는 말과 정확히 일대일 대응이 되지는 않는다. 직역하면 Postmodernism Art는 '탈 근대 미술', Contemporary Art는 '동시대의 미술'이고 실제로도 약간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지만 사실상 지칭하는 대상은 거의 같으므로 여기서는 현대미술, 탈근대미술, 동시대 미술 모두 같다고 가정하고 현대미술로 통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이렇게 현대 미술은 미술사적으로 보면 양차 대전 이후 나타난 미술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1,2차 세계대전은 왜 근대미술과 현대미술을 가르는 분깃점이 된 것일까. 세계대전이 인류사에 가장 끔찍했던 전쟁이라는 것 정도는 대부분 상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전쟁 이후의 무엇이 바뀐 것일까. 그리고 미술사에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이 장에서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이 세계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리고 미술에는 어떤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지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을 통해 알아볼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기술할 텐데 다소 지루하고 어려운 설명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와 그 시대의 미술에 관한 설명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학자와 지성인들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시대라고 부른다. Postmodernism 에서 post는 '~의 다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Post라는 접두어는 우리나라말과는 어순이 달라서 헷갈리기 쉬운데, 예를 들어 'Post-김정은'이라고 하면 '김정은이 죽고 난 다음의 북한 지도자'를 뜻하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의 연장선이므로, 결국 이를 이해하려면 모더니즘을 반드시 먼저 이해해야 한다.     


모더니즘

모더니즘Modernism은 근대Modern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이다. 근대라는 시대는 쉽게 정리하면 정치에서는 민주주의가, 그리고 경제에서는 산업화가 이루어진 '시민과 자본주의의 시대'로 볼 수 있다. 앞서 9장의 근대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시민혁명 이후 왕과 귀족의 손아귀에서 탈출한 시민들이 스스로 사회 시스템을 새롭게 구축해 나가는 시대인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지도자를 선거를 통해 뽑고, 자본가들이 공장에서 만들어낸 물건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여전히 혁명 이후의 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적 맥락을 보지 않더라도 그냥 생활모습으로 생각해 보면,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고, 도시에서 전기를 사용하며, 영화와 같은 대중 문화를 즐기고 살아가는, 보통 '현대적'이다, 혹은 '도시적이다'라고 할 만한 시대 모습이 처음 완성된 시대가 모더니즘의 시대이다.


모더니즘의 뿌리, 합리주의

기본적으로 모더니즘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은 앞서 다루었던 근세의 르네상스 운동과 자연 과학의 발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모더니즘'은 단순히 합리주의 그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는 아니다. 뿌리는 이성과 합리주의가 맞지만 모더니즘은 그 뿌리에서 태어난 열매 같은 것에 가깝다. 여전히 설명하기 모호하지만, 예를 들어 5장에서 다룬 모더니즘 페인팅의 경우 그림의 발전 과정에서 이성이나 합리주의가 작용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모더니즘 페인팅들을 단순히 '이성과 합리주의의 미술'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더니즘은 어떤 시대정신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모더니즘은 어떻게 설명해도 막연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미술사 책인 만큼 예술 분야에서 나타나는 모더니즘에 관해서 이야기해 보도록 할 텐데 예술 분야에서도 가장 확연하게 모더니즘의 특성이 드러나는 분야는 건축과 회화이다. 이 두 분야에서 나타난 모더니즘을 이해하면 모더니즘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전 건축과 근대 건축, 뉴욕의 AT&T 빌딩>


모더니즘 건축

우리는 온통 시멘트나 유리로 덮여있는 딱딱한 도시 건물들 속에 살고 있다.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도시건축들이 원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런 건축들은 전적으로 1900년대 전후의 근대 건축가들의 발명품이다. 근대의 건축가들이 이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고딕이나 바로크 건축 같은 고풍스러운 느낌의 건축들 사이에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고전 건축과 근대 건축의 차이는 무엇일까. 왼쪽의 사진처럼 고전 건축은 화려한 외부 장식이 많은 반면 근대건축은 표면은 시멘트로 단순하게 덮여있고 구조도 직사각형 위주로 매우 단순하다. 말하자면 거의 '발가벗은'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눈에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근대 건축이 처음 등장하던 1900년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발가벗은' 느낌의 건축은 시각적으로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근대 건축을 고전 건축과 비교했을 때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대의 건축은 왜 갑자기 단순해지기 시작한 것일까. 


단순함의 원인 - 자각과 환원

건축이 단순해지는 현상은 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인 '자각'과 '환원'의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각이나 환원이라는 단어는 익숙한 표현은 아닌데, 자각Self-consciousness이라고 하면 스스로의 정체성 인식하는 것, 그러니까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고, 환원이라고 하면 '본래의 것으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건축이 마치 사람처럼 '스스로 정체성을 인식하여' '스스로에게 돌아갔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무슨 뜻일까.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요리에서의 '자각'과'환원'을 생각해 보자. 어느 요리사가 평생을 거쳐 요리를 연구하고 있다. 이 요리사는 수년 동안 프랑스, 중국, 이탈리아 등등 전 세계를 돌면서 수천 가지의 요리방법을 터득하며 경지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앞으로만 달려가던 요리사는 어느 날 갑자기 슬럼프에 빠져서는 혼자 주방에 앉아서 문득 '음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요리사는 이에 대해 어떤 대답을 찾을 수 있을까. 물론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답을 찾기 어려운 난해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오히려 더 간결한 형태로 드러날 수도 있다. 예컨대 '음식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영양소다'와 같은 단순 명쾌한 답변을 찾게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요리사는 이 답변에 따라서 지금까지 세계를 돌며 배워왔던 여러 가지 화려한 요리 테크닉을 제거시키고, 영양소를 잘 고려한 간결하고 건강한 요리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일종의 '자각'과 '환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요리를 연구함에 있어 '음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것이 '자각'이고 결과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영양소'로 돌아가는 것이 '환원'인 것이다.

근대 건축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건축의 본질을 고민하는 자각과 환원의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과거의 건축가들은 스스로 건축이 무엇인지에 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항상 외부의 권력의 요구에 발맞추어 왔을 뿐이다. 예컨대 중세에는 종교 권력자들의 요구에 따라 거대한 성당을, 그리고 절대왕정시대에는 베르사유 같은 화려한 궁전을 지어 권력자들의 요구에 맞는 건축을 해 왔다. 그런데 혁명 이후 근대로 접어들면서 건축가들은 권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스스로 '건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고민하기 시작한다. 건축가들은 과연 어떤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세상에는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건축이 있으니까 명확한 하나의 정답을 구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답변을 구한다면 아마 건축은 '인간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이다'와 같은 본질적인 답변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건축가는 '인간의 생활공간'이라는 간결한 원칙을 따라서, 건축의 화려한 외부 장식들은 제거시키고 '생활공간'이라는 원칙에만 집중한 매우 실용적이고 간결한 건축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근대 건축이 단순한 형태를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건축의 본질이 생활공간이라면 외부 장식은 제거시켜야 할 불필요한 요소들이 된다. 건축가들은 건축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질문하고 답변을 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단순하고 본질적인 '인간의 생활공간'이라는 답변을 구하게 되었고, 이 답변을 원칙으로 건축도 단순하게 변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 현상을 건축에서의 '자각'과 '환원'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건축이 '스스로의 존재에 관해 고민하는 것'이 '자각'이고, 고민 끝에 스스로의 본질인 '생활공간'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이 '환원'인 것이다. 


근대의 건축가들

건축에서 나타난 '자각'과 '환원'의 현상은 아무래도 구체적 사건이 아닌 어떤 현상이므로 여전히 모호하다. 그렇지만 실제로 근대의 건축가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가장 잘 알려진 근대의 건축가인 르꼬르뷔지에, 아돌프 로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에 관한 설명인데, 각 건축가들의 소신은 다르지만 자각과 환원의 측면에서 보면 묘하게 서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코르뷔지에 드로잉 – 르코르뷔지에는 근대건축의 기본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근대 건축가들의 고민 – 르코르뷔지에

프랑스 건축가인 르코르뷔지에는 자신만의 건축 철학을 5개의 원칙으로 정리해 놓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 중 첫 번째는 필로티Pilotis라는 건축 공법에 관한 것이었다. 이 건축 공법은 현대 건축 양식의 기본 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의 그림은 필로티 건축의 기본 구조를 보여주는데 잘 보면 벽의 역할이 없고 철기둥이 건물 전체의 뼈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 건축의 경우에는 벽이 건물의 무거운 하중을 견디기 위한 역할도 하였기 때문에 벽이 상당히 두꺼워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르코르뷔지에는 모든 하중을 기둥으로 완전히 몰아서 벽을 자유롭게 만든 것이다. 우리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벽 전체가 유리로 된 건축은 이런 르코르뷔지에의 아이디어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르코르뷔지에는 왜 하중을 모두 기둥으로 몰려고 하였을까. 이 필로티 공법은 거주공간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매우 실용적이다. 벽의 두께를 줄이면 그만큼의 공간 손실을 피할 수 있고, 또 벽을 유리로 대신하면 태양을 조명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므로 채광의 측면에서도 훨씬 효율적이다. 벽이나 외부장식 같은 군더더기가 제거되는 대신 실용성이 강화된 것이다. 이는 건축의 본질인 '사람의 생활공간'이라는 실용적인 목적 아래 본질로 '환원'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아돌프 로스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도시 건축에서 배관공Plumber의 역할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는 실용성을 고려한 것인데 역시 고전 건축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예를 들어 중세시대의 성당에서 중요한 것은 신자들을 압도할만한 거대한 구조와 화려한 외관이지 배관과 상하수도와 같은 사람이 사는 것에 대한 기능적인 측면은 아니었다. 중세의 성의 경우에는 화장실 배수시설이 없어서 대변을 보면 그냥 밖으로 떨어지는 구조였는데 웅장한 외관에 집중했을 뿐 인간의 '생활편의'는 별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아돌프 로스는 건축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고 사람이 사는데 위생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므로 고대 로마 건축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수도와 배수의 기능, 즉 배관공의 역할을 강조했던 것이다. 외적인 형태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의 본질인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근대 건축에서 배관공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 역시 건축이 스스로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그 본질인 '생활공간'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자각'과 '환원'의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스 반 데 로데Mies van der Rohe의 'Farnsworth House', 1946-1951>

미스 반 데 로에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에서 활동했던 건축가인데, 건축사에서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 말도 역시 다른 근대 건축가들과 비슷한 흐름으로 파악할 수 있다. 미스 반 데 로에가 이 말을 했던 이유는 건축에서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게 되면 사람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공간이 그만큼 넓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건축이든지 근본적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인데 이렇게 기능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선 Less is more, 그러니까 '(장식이)적은 것이 (공간이)많은 것이다'라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역시 다른 근대 건축가들과 마찬가지로 건축의 본래의 목적인 '생활공간'으로 환원하는 현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건축에서의 모더니즘

축약해서 다루긴 했지만 이 근대를 대표하는 세 명의 건축가들은 모두 비슷한 종류의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세 명의 근대 건축가들이 만나서 토론을 통해 어떤 결론을 내린 것도 아닌데 묘하게도 서로 매우 비슷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공통점은 화려한 외관을 제거하고 건축의 본래 목적인 '사람의 생활공간'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성이다.     


모더니즘 건축이 단순한 형태를 띠게 된 것은 이렇게 건축이 자각과 환원의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더니즘의 자각과 환원의 현상은 건축뿐 아니라 회화, 조각, 문학, 음악 등 다른 분야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다음으로는 회화에서 나타난 근대 현상을 살펴볼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회화와 건축은 서로 전혀 상관없는 분야인데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앵그르의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1808, 잭슨폴록의 ‘No.5' 1948>

모더니즘 회화

회화에서 나타난 모더니즘 현상은 5장의 모더니즘 페인팅에서 자세히 다루었지만, 여기서는 자각과 환원이라는 관점에서 짧게 다시 살펴볼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상주의부터 시작되어 잭슨 폴록을 거쳐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까지 가는 과정이 회화에서의 모더니즘 형성 과정이다. 

인상주의 이후의 예술가들은 계속 새로운 회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상주의의 대표화가 모네부터 후기 인상주의의 고갱, 고흐, 세잔을 거쳐 입체주의의 피카소, 그리고 야수주의와 절대주의 같은 여러 사조들, 최초의 추상화가 칸딘스키 등등 그 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은 남들보다 더 새롭고 뛰어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새로운 시도와 노력들을 해 왔다. 그런데 이들의 노력을 관통하는 하나의 생각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앞서 요리사나 건축가들이 했던 질문과 유사하다. 회화라는 장르가 스스로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그 끝에 '회화의 본질은 평면예술이다'라는 간결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림이라는 것은 입체가 아닌 평면에 그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평면',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예술이니까 '예술', 이 두 가지를 합쳐서 '평면예술'이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화의 본질인 평면예술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술가들은 고전회화에서 답을 찾게 된다. 왼쪽 그림은 앵그르의 누드화인데 이 고전 회화를 보고 '평면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고전회화는 사실 그 반대에 가깝다. 과거의 예술가들은 예술가의 뛰어난 기교를 통해 대상이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노력했기 때문이다. 

근대의 화가들은 고전회화에서 예술가의 '기교'를 통해 사람들이 입체를 인식하는것을 행위를 '환영Illusion'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 환영을 제거하게 되면 평면으로 '환원'할 수 있게 된다.  

오른쪽의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보면 아무런 입체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저 '혼란스러운 평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술사를 잘 모를 경우 '왜 이런 그림이 예술이냐'라고 반문하곤 하지만, 근대 현상의 관점에서 보면 잭슨폴록의 회화는 회화의 본질에 가장 근접하였다. 그래서 미국의 평론가 그린버그는 고전 화가들이 사용했던 어떤 기교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혼란스러운 평면'을 구축했던 잭슨 폴록의 회화를 보고 '근대Modern미술을 대표하는 회화'로 평가하게 된다. 

이렇게 회화가 평면이라는 본질로 환원하는 것은 '자각'과 '환원'이라는 측면에서 건축에서 나타난 현상과 비슷하다. 근대회화 역시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2차원 평면'이라고 '자각'한 후 2차원으로 '환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회화와 건축 모두 각자의 본질을 추구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본질로 돌아가서 자기 완결성을 갖기 원했던 것이 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이다>

  

모더니즘 Modernism현상

이렇게 근대건축과 근대회화는 서로 전혀 다른 분야인데도 서로 유사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재미있다. 건축은 스스로를 '생활공간'으로 자각하기 시작했고 회화의 경우 스스로를 '2차원 평면'이라고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건축과 회화 둘 다 스스로를 자각 한 그대로, 스스로의 본질로 환원하는 길을 쫒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지면상 다루지 못했지만 다른 여러 예술과 문화 분야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향들이 나타난다. 예컨대 조각에서는 고전 조각의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적인 인체 조각'의 형식을 버리고 조각의 본질을 '입체감 있는 덩어리'로 규정하게 된다. 그래서 근대 조각에는 아무런 형상도 없이 그저 둥글거나 각진 덩어리만 있는 조각들을 만들기 시작한다. 또 음악에서는 음악의 본질을 '소리'로 규정하게 되는데 고전 음악의 아름다운 화성학을 포기하고 쇤베르크의 13 음계로 대변되는 무조 음악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 역시 음악이 스스로를 소리로 자각하고 그 본질로 환원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각'과 '환원'의 현상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근대사회 전반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독특한 문화현상인 것이다. 


자립의 과정

이렇게 '자각'과 '환원'은 모더니즘의 핵심 현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현상은 왜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왜 이 현상이 거의 모든 사회 문화에 공통적으로 등장하였을까. 

이는 시대의 주인이 시민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근대의 시민들은 시민혁명 이후 스스로 세상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이렇게 새로운 주인공이 되고 나면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게 된다. 고전 문화는 왕과 귀족을 위해 발전해온 문화였으므로 말하자면 근대 시민들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시민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화가 필요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전시대에 왕과 귀족에게 잡혀 살던 시민들이 혁명 이후 새로운 문화를 구축하는 것은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면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과 비슷하다. 과거의 왕과 귀족, 교회와 같은 권력 중심으로 꽃 피었던 문화를 폐기시키고 시민들을 위한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어야 한다는 것 까지는 알겠는데, 새로운 문화란 도대체 무엇이고 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는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건축의 경우 앞서 예로 든 것처럼 고전 건축을 폐기시키고 시민 시대에 맞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만들어 내려고 하면, 아무런 바탕이 없으므로 완전히 기본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런 상황이라면, 우선 '건축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기본적인 질문으로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기본적인 질문을 하고 나면 그에 대한 답은 가장 보편적인 답변으로 우선 귀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편적인 근원'으로 가려는 경향이 '환원'의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회화에서 나타난 양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전회화와 전혀 다른 새로운 회화를 그리기 위해선 우선 '회화란 무엇인가?'와 같은 가장 기초적이고 본질적인 고민부터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변으로 '회화는 2차원 예술이다'와 같이 단순하고 근원적인 답변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모더니즘 - 결론에 도달한 자기 완결성

이것이 시민의 시대에 나타난 모더니즘 현상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자각'과 '환원'이라는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시민문화가 권력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우선 스스로에게로 돌아가서, 스스로를 탐구하고, 스스로를 완성시키려 하는 노력, 일종의 '자기 완결성'을 갖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모더니즘 현상은 예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나타난 문화현상을 통칭하는 말이다. 당연히 사회, 경제, 정치에서 나타난 모더니즘 현상도 살펴보면 좋겠지만, 미술사 책인 만큼 여기서는 건축과 미술에서 나타난 모더니즘 현상에 관해서만 살펴 보았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이 두 가지 경우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대의 비극, 1,2차 세계 대전은 서구인들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게 된다>


완성된 모더니즘의 붕괴-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

모더니즘은 이렇게 새로운 시민사회에 나타나 새로운 세계를 완성시키게 된다. 그런데 모더니즘의 세계는 스스로의 고민들을 통해 스스로 정답들을 구해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정답들로 인해서 붕괴하게 된다. 이 과정을 촉발시킨 것은 두 번의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비극이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즉 '탈 근대'이다. 이 과정을 한번 따라가 보자.

영국과 프랑스와 같은 서양의 주요 국가들은 민주주의와 산업화로 대변하는 근대화, 즉 모더니즘의 세계를 가장 먼저 완성시키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문명을 들고 아프리카, 인도, 중국, 일본 등등 전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이것을 보통 제국주의Imperialism 혹은 식민주의Colonialism라고 부르는데 이 확장주의는 기본적으로 '서양이 정답이다'라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서양 문명에서 줄곧 중심 종교였던 기독교의 경우,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우선하는 '정답'이라는 사고방식이 있어야 선교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건축과 회화에서도 '자각과 환원'의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에 대한 어떤 정답과 원칙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 '정답'이 완성되고 나면 그 정답을 외부세계에 가르쳐 주는 것은 정당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서유럽의 선진 국가들은 그들이 근대에 완성시킨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철학적으로는 이성 중심주의가 가장 좋은 사회 시스템, 즉 '정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가장 먼저 완성시킨 것은 서양이고, 현시점에서는 이보다 더 효율적인 사회구조는 찾기 어려우므로 '서양이 정답이다'라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의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은 서양이 먼저 이룩해 놓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도입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답의 폭력성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를 '정답'으로 규정한 서양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비극도 같이 발생하게 된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서양 국가들의 세력다툼의 결과로 나타난 두 번에 걸친 세계 대전이고, 그 외에도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고통에 빠뜨린 노예무역, 그리고 수천만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죽게 만든 미국의 신대륙 개척 등이 있었다. 보통은 계몽의 빛에 가려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근대 이전의 인류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또는 존재할 것이라고 아예 상상조차 못 했던 거대한 규모의 비극들은 근대의 '전 세계적 서양화 과정'에서 같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는 이 비극들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니까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절대로 체감할 수 없을 텐데, 가족이나 마을 하나가 전부 죽어나가는 단위를 훨씬 넘어서서 도시나 국가단위에 준하는 공동체가 소멸하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비극들이 근대의 발전 과정에서 있었던 것이다. 근대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찾다 보면 자주 '수백만'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는데, 사람이 100명만 죽어도 전 세계적 뉴스가 되는 지금 시점에서 '수백만'이라는 숫자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조차 잡기 어렵다.   

 

<위의 천체 그림처럼, 근대의 서구인들은 ‘서양 백인 남성’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그들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백인 남성 중심의 세계관

'서양이 정답'이라는 사고방식은 '세계가 서양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양을 중심에 놓고, 다른 주변은 지배하고 고쳐나가는 것이다. 한편 이 '서양 중심의 사고방식'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면 '서양 백인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서구의 근대사회를 창조한 것은 백인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학 분야 하나만 생각해 봐도 뉴턴, 아인슈타인, 에디슨, 패러데이, 다윈 등 거의 모든 과학 분야를 개척하고 완성한 것은 백인 남성들이었다. 이 백인 남성들은 이렇게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문명을 만들어낸 창조자라는 것이다. 


창조자와 파괴자

그런데 이 창조자인 백인들은 한편으로는 파괴자이기도 했다. 백인들은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잔인한 식민지 개척, 그리고 노예무역 등 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들을 일으킨 주체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백인들이 이런 비극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근대의 눈부신 문명을 이룩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 정도 비극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근대의 이 끔찍한 비극들은 백인들이 탄생시킨 근대문명의 아름다움으로 상쇄시키기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붕괴하는 모더니즘 - 포스트모더니즘의 발생

여기서 모더니즘은 붕괴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제국주의의 비극을 겪으면서 이제부터는 이 '백인 남성 중심의 서구 문명'과 이들이 만들어낸 모더니즘이라는 '정답들'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다. 수천만의 생명을 죽게 만들고 세계를 비참하게 만든 이 백인 남성 중심의 세계관은 더 이상 '정답'으로써의 명분을 가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타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완성된 모더니즘으로부터 탈출하는 것, 그리고 서양 백인 남성이 만들어 놓은 정답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만든 세계는 양차 대전을 통해 인류사에 가장 큰 비극을 만들었으므로 더 이상 정답도 될 수 없고 중심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보통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할 때 '해체Deconstruction'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 해체하는 대상은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과 서양이 근대 사회에서 완성시켜온 정답, 모더니즘을 해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성에서 상대성으로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백인과 유럽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절대성'을 버리고, 여러 인종들과 각 약소국가들과 민족들의 '상대성'을 인정하기 시작하게 된다. 모더니즘에서 나타난 서구 백인 중심의 절대성이 무너지고 나면서 변방의 주체성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동하는 것은 서구 중심의 '절대성'에서 변방의 '상대성'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아래에서 위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세계관의 변화는 역사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즉 '관점의 변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 대륙이 서양에 의해 식민지화되고 미국이라는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서양의 관점에서 보면 신대륙을 정복하여 자신들의 후손이 살 수 있는 땅을 개척하고 발전된 서양의 문물을 퍼뜨리는 '정복'의 과정이 된다. 근대 서구 사회에서는 이것을 '개척자 정신Frontier'로 정의하고, 용감하게 미지의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미화하기도 했는데 '프런티어 정신'이라는 말은 지금 생각해봐도 도저히 부정적인 뉘앙스가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원래 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아메리카 원주민(보통 '인디언'으로 알려져 있는)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적으로 학살의 과정이다. 자신들은 그저 그 땅에 살고 있던 죄 밖에 없는데 오로지 힘이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스로 왜 죽어야 하는지 조차 알지도 못한채 죽어 나간 것이다. 그 숫자는 수천만에 달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의 죽음에 관해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원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발전된 서양문화의 전파가 아니라 자신들의 멸절일 뿐이다. 

또 다른 예로 과거부터 근대까지의 로마시대의 역사 연구를 보면, 기본적으로 '로마가 차례로 주변 세력을 점령하여 큰 대제국을 이루고 번성하였다'정도의 기본적인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로마의 입장에서 본 서구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로마에 의해 정복당한 소수민족의 입장, 그러니까 소수민족들이 로마에 의해 어떻게 학살당하였나에 관해 연구하거나, 카이사르가 얼마나 많은 야만족을 죽였나 와 같은 전통적인 역사관에 반하는 '아래로부터의' 연구도 나타나게 된다. 전통적인 역사관에서 로마는 영광의 시대였고 야만을 부수고 문명을 전파하는 정의로운 주체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는 소수민족들을 철저하게 파괴시킨 학살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은 백인 남성 중심의 '절대성'을 버리고 점차 그 주변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우리는 별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지금 이미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안에 살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모더니즘에서 완성시킨 정답들 혹은 어떤 원칙들을 무너뜨리는 것인데, 우리는 이런 정답들이 해체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전통적으로는 결혼의 '정답'으로 여겨지는 것은 남녀 간에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는 남성끼리 결혼을 한다거나, 여성끼리 결혼을 한다거나, 평생 결혼하지 않고 연애만 한다거나, 돌고래 같은 동물들과 결혼한다거나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용인되고 있는데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여파로 볼 수 있다. 모더니즘에서 완성된 결혼의 정답이 붕괴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히틀러가 수십만의 동성애자들을 학살했던 것이 1940년대로 그렇게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불과 몇십 년 전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동성애자들이 정식으로 결혼한다는 것은 아마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근대적 사고방식에서는 결혼의 정답이 존재하고 이는 남녀 간의 결혼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도 대부분 전통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소수 성애에 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열린 자세를 가지게 된 것 자체가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처음 나타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2015)’에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 - 백인 남성에서 여성, 유색인종으로>

대중문화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모더니즘에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정답'으로 알려져 있는 것들을 해체시켜 나가기 시작하게 된다. 이 변화의 핵심 중 하나는 모더니즘의 중심에 있던 '백인 남성 중심의 사회'를 해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이 백인 남성의 가치를 해체시키게 되면 자연스럽게 여성, 유색인종, 소수민족과 같은 변방에 있던 사람들이 주인공으로써 등장하게 된다. 이 현상은 자연스럽게 현대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데 예컨대 최근에 나온 스타워즈 시리즈에서도 이런 경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오리지널 스타워즈 시리즈는 잘 생각해 보면 기본적으로 '백인 남성'들의 싸움이다. 그런데 2015년에 개봉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Star Wars: The Force Awakens)에서는 새로운 주인공이 백인 남성들이 아닌, 여성과 흑인이다. 사실 스타워즈의 팬인 입장에서는 갑자기 개연성이 떨어지는 듯 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성 세계를 거쳐 이제는 대중매체에도 그 영향이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대에 성장한 도시들은 근대 건축의 ‘정답’으로 생각했던 획일화된 빌딩이 점령하고 있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이 ‘획일성’과 ‘정답’으로 부터 탈피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왼쪽은 시카고의 근대건축들, 오른쪽은 현대건축가 프랭크 개리의 건축>


건축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모더니즘을 해체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모더니즘 건축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란 무엇일까. 모더니즘 건축에서는 건축의 '정답'이 무엇인지를 찾는 과정에서 '인간의 생활공간'으로 환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어떤 '정답'이 있다는 것은 그 정답에 맞추어서 건축이 전체적으로 획일화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 모더니즘 특유의 단순한 건축들은 근대에 성장한 도시들에서 획일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미국의 도시들이나 서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주요 도시들을 떠올려 보면 도시 전체가 딱딱하고 단순한 형태의 고층 빌딩들로 '뒤덮였다'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많은 수가 세워져 있다. 이 도시들은 근대Modern에 급성장한 도시들이기 때문에 모더니즘 양식으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이런 모더니즘 건축을 탈출하는 양식이다. 모더니즘 건축 특유의 딱딱한 벽돌 같은 건축에서 벗어나 새로운 건축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른쪽 그림에서 처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근대건축의 획일성과는 달리, 어떤 하나의 경향으로 묶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대에 확립된 어떤 획일화된 건축의 '정답'을 폐기시키고 수많은 새로운 '대안'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대안'에는 경계도 제한도 규정도 없다. 건축가 개인의 이상향과 철학에 따라 새로운 종류의 실험적인 건축을 하기도 하고, 서구사회 중심의 반대라는 의미에서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의 지역 특성과 민족 특성 등을 고려하여 각 지역에 맞는 새로운 건축 양식을 시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던'한 건축을 상상해 보면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특징이나 한국의 자연, 민족성 등을 고려해서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건축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포스트모던한 건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리포드 스틸 'PH-972' 1959, 도널드 저드 '큰 쌓임'1968, 추상표현주의와 미니멀리즘>

미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모더니즘을 탈출하면서부터 나타나게 된다. 이 과정은 5장 모더니즘 페인팅의 마지막 '개념미술'부분에서 다루었으므로 다시 잠깐 5장을 읽어보기를 권하지만 '모더니즘의 탈출'이라는 관점에서 짧게 다시 기술하도록 하겠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모더니즘미술은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는 과정이었다. 이 고민은 인상주의부터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진행되어 왔는데 이 과정의 끝에서 '평면 예술'이라는 가장 본질에 근접한 답을 얻게 된다. 모더니즘 페인팅은 이렇게 스스로 구한 정답에 따라 평면성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모더니즘의 대표 화가인 잭슨 폴록은 아무런 입체감이 발견되지 않는 그저 '혼란스러운 평면'을 구축하는 하는 것으로 모더니즘의 강령에 가장 근접하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잭슨폴록 이후에도 뉴욕에 활동하던 수많은 화가들 또한 새로운 '평면적 회화들'을 그렸다. 이 화가들 그룹을 추상표현주의라고 부른다. 

추상표현주의 다음에 등장한 미술이 미니멀리즘이었다. 미니멀리즘은 대부분 설치Installation작품들이었는데, 그 자체로 모더니즘의 탈출, 즉 포스터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모더니즘은 전통 미술의 형식인 '회화와 조각'의 완성에 관한 것인데, 설치미술은 '회화나 조각' 그 둘 중 어느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설치미술은 미술사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미술형식이다. 

어떤 사람은 오른쪽 도널드 저드의 미니멀리즘 작품을 보면서 눈에 보기에는 어쨌든 입체니까 조각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선 조각의 정의가 정확히 무엇인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조각의 정의를 '대상을 보고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상식의 수준에서 정의해 보면 저렇게 쌓여있는 육면체들이 무엇을 보고 비슷하게 만들려고 한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어떤 작품이 '설치' 되어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데미안 허스트의 설치 미술과 회화, 두 작품은 ‘설치’나 ‘회화’라는 물리적 특성도 다르고 시각적인 스타일도 전혀 다르지만 둘 다 동일한 작가의 작품이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시작 개념미술

미니멀리즘 다음에 나타난 개념미술부터 미술은 완전히 모더니즘을 탈출하게 된다. 모더니즘 예술은 '회화와 조각'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념미술에서는 예술이 '회화와 조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미니멀리즘의 설치를 넘어서서 퍼포먼스, 영상, 소리, 체험 그 어떤 방식이든 자유롭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예를들어 현대 예술가 데미안 허스트는 자신의 예술의 아이디어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회화나 조각, 설치, 퍼포먼스, 영상 그 어떤 방법이든 자유롭게 사용한다. 

보통 개념미술을 포스트모더니즘 미술, 즉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이 때문인데, 건축이 모더니즘 건축 양식을 벗어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으로 진입하는 것 처럼, 미술에서는 모더니즘 양식인 '회화와 조각'에서 벗어나면서 설치나 퍼포먼스같은 수많은 새로운 미술 형식으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술에서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와 비슷한 시기에 미술계의 중심이 백인 남성에서 여성과 유색인종으로 옮겨가는, 또다른 의미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성 예술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미’ 영국 테이트 모던 앞, 1999>

백인 남성 중심에서 탈피하는 미술 세계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모더니즘의 주체는 철저하게 '백인 남성'이었다. 이는 미술에서도 당연히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모네, 반 고흐, 뒤샹, 잭슨 폴록과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도 모두 예외 없이 백인 남성이었다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그런데 1970년대 전후로 미술계에서는 루이스 부르주아 같은 여성 예술가, 바스키야 같은 흑인 예술가, 또는 백남준이나 오노요코 같은 동양계 예술가들이 주류로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다. 서양 백인 남성 중심에서 탈피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형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인데, 미술에서도 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성과 유색인종 예술들이 주류로 활동하는 것은 그 자체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위의 작품은 루이스 부르주아라는 프랑스 여성 예술가의 작품인데, 그녀는 어머니라는 여성의 정체성에 관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바스키야와 같은 흑인 예술가들은 흑인의 정체성에 관한 미술들을 시도하였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모네와 고흐가 활동하던 근대를 생각해 보면 여성이나 흑인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예술을 창조하는 것 자체로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개념미술이 처음 등장하던 비슷한 시기에 수많은 여성, 유색 인종 예술가들이 역사에서 처음으로 서양미술의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현상은 이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지금 활동 중인 수많은 예술가들을 살펴보면 '백인 남성'이 아니라 성별과 인종, 그리고 국적과 상관없이 다양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렇게 형식적으로나 주체가 변하는 현상으로 보나 모더니즘 미술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다. 간략하게 다시 정리해 보면 형식적으로는 근대에서 정답을 구하고자 했던 회화와 조각에서 탈출하여 퍼포먼스, 설치, 영상미술 등과 같은 수많은 예술형식으로 다양화하는 것, 그리고 현상적으로는 백인 남성 중심에서 여성, 유색인종으로 다양화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인상주의부터 시작된 '다양성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모더니즘을 거쳐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고있다. 계속 강조하였던 것처럼 미술은 정확히 시대를 반영한다. 지금 시대를 생각해 보면 이제는 어떤 절대적인 종교나 가치관이 세상을 완전히 지배하지 못하고, 어느 인종이나 민족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고 쉽게 말하기 어렵다. 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현대미술이다. 현대 미술에서는 회화와 조각이라는 과거의 절대적인 형식으로부터 탈출하고, 백인 남성 중심에서 탈출하여 성별 인종을 초월하여 전 세계적 다양성이 확대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학자들이 양차대전 이후 나타난 문화현상으로 정의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미술에 반영되어 있다. 미술은 양차 대전과 관계없이, 내부적 고민을 통해 발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외부 시대의 흐름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이 재미있다. 예술가들과 평론가들은 오로지 미술이라는 장르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왔을 뿐이지만 결과물을 보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이미지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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