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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Mar 09. 2021

겨울이 저벅저벅 걸어올 때

이제, 겨울이 준비한 기적을 만날 시간.

스웨터를 꺼내 입을 때의 행복이 있다. 두꺼운 목도리를 목에 두를 때의 행복도 있다. 두꺼운 옷을 입고 차가운 공기를 마실 때의 행복이 있다. 시린 손끝을 따뜻하게 녹일 때의 행복이 있다. 얼굴은 추운데 엉덩이는 따뜻한 곳에서 귤을 까먹을 때의 행복이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까슬거린 울 양말을 신을 때의 행복이 있다. 이불 시트에 두꺼운 솜을 욱여넣을 때의 행복이 있다. 차가운 손을 사랑하는 사람의 주머니에 함께 넣을 때의 행복이 있다. 차갑고 서늘한 겨울 내를 들이마실 때의 행복이 있다.


계절 중에서 유독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을 사랑하는 데에는 손꼽을 수 없이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유독 겨울 내를 좋아했다. 코끝을 시리게 만드는 서늘하고도 상쾌한 그 내음이 좋았다. 겨울내의 향과 기운은 차가운데 이상하게도 그 냄새를 맡으면서 따뜻함을 떠올리곤 했다. 겨울 내와 함께 찾아오는 옛날식 난로 냄새나 난로 위에서 지글지글 끓는 주전자의 수증기 냄새나 따뜻한 겨울 목도리에서 나는 장롱 냄새라든지 외할머니네 옛날 집 구들장의 지글거리는 방바닥 냄새와 군고구마나 붕어빵의 냄새 같은 따뜻하면서 달큰한 냄새 그리고 겨울이면 즐겨마시는 유자차의 달고 신 냄새가 겨울 내와 함께 내게 온다. 그래서 겨울 내는 시리지만 시리지만은 않다. 내게 겨울은 추운 계절이기보다는 따뜻함을 만끽할 수 있는 계절이라 여겨졌고 그래서 나는 겨울을 특별히 사랑했다.


겨울이 채 오기도 전, 가을이 들어서면 나는 가을 옷과 겨울 옷을 꺼내기 위해 옷장을 정리한다.  겨울 옷을 꺼내면서나는 먼지와 따수운 냄새에서 그리고 겨울 옷들의 촉감에서 겨울을 앞서 만난다. 행복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겨울이 온다는 행복, 곧 이 따스한 옷들을 입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옷장을 정리하는 노동은 행복을 기다리는 준비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걸어 놓은 두꺼운 목도리를 얼굴의 반을 덮을 정도로 두르고 다니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따뜻해진다.


그리고는 두꺼운 이불을 준비하는 것이다. 지퍼가 달린 얇은 홑이불에 두꺼운 겨울 솜의 이불 속통을 집어넣는 일은 혼자서 하기에 꾀나 버거운 일이기도 하지만 끝내고 나면 이보다 더 뿌듯할 수 없다. 사락거리는 이불의 겉면의 촉감과 더불어 숨이 가득 들어차 부푼 이불 위에 몸을 누이면 '아, 행복이란 이토록 소소한 것에 묻어 있구나.' 하고 깊은숨을 들이마시곤 한다. 겨울이불을 덮고 잠을 잘 때엔 두꺼운 이불을 둘둘 말아 이불을 덮는 것인지 안고 자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자세로 이불과 포개어져 자는 것이 제맛이다.


그렇게 겨울이 오고 나면 매서운 날씨에 몸을 사리면서도 밖은 추운데 내 몸은 따뜻한 공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감과 안정감을 느끼곤 한다. 어딘가 보호받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 추운 날씨에 그래도 내 한 몸 따뜻하게 데울 곳이 있구나 나를 지킬 공간 하나쯤은 있구나 싶어서 마음도 함께 포근히 데워진다.


그렇지만 추운 겨울바람이 부는 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군중 속에 있어도 좋다. 이리도 추운 날엔 다들 '집 밖은 위험해.'를 외치며 꽁꽁 움츠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거리는 북적이고 사람들은 움직이고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고 좋은 것을 보러 다니고 사람을 만나고 행복을 찾는다. 그런 북적임 속에 있다 보면 추운 날씨와 북적임이 뒤엉켜 더욱더  생기가 솟는다. 겨울의 시린 차가움을 인간의 사랑과 행복을 향한 단단함이 뚫고 나온다.


그런 겨울이. 내가 특별히 더 사랑하는 계절이 저물고 있다. 겨울의 차가움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흐릿해진 차가움이 언제나 그랬듯이 자상하고도 강인한 봄볕에게 올해도 자리를 내어준다. 겨울이 오는 것은 시린 차가움으로 우리를 움츠려 들게 하려 함이 아닌 따뜻함의 소중함을 알게 하기 위해, 따스함을 만끽하기 위해, 곁에 있는 이와 더욱 가까이 있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게 하기 위함 인지도 모르겠다. 꽁꽁 언 대지를 뚫고 나오는 이른 봄 가녀린 싹 하나의 기적을 우리는 매년 만나기 위해.  '기적'이라는 이름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겨울은 그토록 매섭고, 그토록 차갑고, 그토록 혹독한 것인지도 모른다.


늘 우리의 겨울은 끝이 아닌 시작이며 새 세상을 향한 숨 고르기이다. 겨울이 사랑스러운 것은 어쩌면 봄이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봄을 있게 한 겨울이기에 그 봄을 더욱 빛나게 할 겨울이기에 나는 겨울을 더욱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이제 곧 봄이다. 겨울이 준비한 기적을 만날 시간.

너무나 익숙해서 알아채지 못한 기적. 그것은 겨울과 봄의 콜라보.


우리는 겨울을 뚫고 나온 그 봄을 그 거대한 기적을 언제나 어김없이 처음처럼 사랑한다.

나 또한 겨울을 사랑하듯 봄을 사랑한다.


겨울의 선물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봄 맞으러 가자.




-2021년의 봄은 2020년의 봄처럼 짝사랑으로 끝나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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