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엽 일병 구하기!

SES! Self Emotional eating Stop 트라우마다이어트

by 익자

31화. 사라진 소리 멀어진 우리 부서진 일상


어느새 5년 전이다. 그때 막내 아이의 모유수유를 하느라 일 년을 묵힌 종양은 감사하게도 양성이었다. 한 시간 정도의 부분마취 후 시술로 종양은 깨끗이 제거되었다. 그 양성 종양을 가장 시급히 수습한 건 앉고 일어서고 걷고 눕는 최소한의 몸의 기능을 제대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악성 종양이 아니길 천만다행이었다.

종양을 제거한 후 회복기를 거친 뒤에는 또 다른 내 몸의 복병 귀 수술에 나섰다. 하늘이 맺어준 핏줄로 이어진 엄마와 나를 완전히 놓아버린 건 내가 귀를 다친 그날 밤부터다. 캐나다에 와서 바로 수술하고 싶었지만 다니엘과 내게 허니문 베이비인 첫째 아이가 찾아와 그러질 못했다. 임신과 출산 육아 십일 년을 지나오며 먼 나의 왼 귀를 잊었다. 그 일로 더 멀어진 엄마를 내 귀를 멀게 한 엄마를 잊어보려 했지만 더 선명해질 뿐이었다. 그날 밤의 공포 기억은.


귀를 먼 후 엄마와의 관계에 대한 희망고문을 나는 멈추었다. 한국과 캐나다의 거리보다 더 멀리 엄마를 마음속에서 보내려 노력했다. 귀를 먼 그날 밤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한쪽 귀의 청력만으로 살기는 예상보다 힘들었다. 오로지 오른 귀만으로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듣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큰 소리에 민감한 나이기에 거의 들리지 않는 왼 귀는 더욱 치명타였다. 남편과 네 명의 아이들과의 소통에서 더 큰소리로 말해야 하는 상황이 빈번했다. 소리에 예민도가 높은 나로서는 잃어버린 왼 귀에 대한 안타까움이 들수록 엄마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왼 귀를 먼 후 더 멀어진 우리의 마음을 안다. 엄마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귀 먼 뒤에 더 멀어지고 싶었다. 나는 엄마와도 한국과도.


가끔 생각해 본다. 아이들을 낳아 키우는 십 년 이상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엄마를 잊은 적이 없다. 더 정확힌 멀어버린 귀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귓방망이로 소리의 반을 잃어버리고 내 인생의 희망도 놓았었다. 그날 밤부터 엄마를 있는 힘껏 밀어내기 시작했다. 한쪽만 남은 소리를 가슴에 품고 캐나다로 떠나오며 비행기에서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작게 없어져버린 소리가 내 따뜻했던 신혼 때의 일상을 모두 앗아갈 줄 그 밤엔 몰랐다. 알았더라면 온 엄마집의 그 방을 밤새 뒤져서라도 어딘가 어느 가구 모서리에라도 붙어 뛰고 있던 내 고막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아기들이 커가고 말이 자라는 아이가 되어가면서 나는 우리 집의 균열에 그 어떤 지진과 쓰나미보다 매일이 불안했다. 두렵고 무서워 깨어나고 싶지 않은 아침이 점점 늘어갔다.

“엄마 안 들려! 안 들리니까 제발 큰 소리로 말해줘! 그리고 엄마 왼쪽에선 말하지 말라니까! 영어로 얘기하려면 오른쪽으로 와서 말해줘! 제발! 여보 안 들린다니까!”


어린 딸들에게 남편에게 소리치며 눈물짓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크고도 거친 소리가 너무나 공포스러우면서도 점점 더 큰 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는 십여 년의 세월이 사실 참 고통스럽고 기괴했다. 소리도 안 들리거니와 모르는 언어를 알아먹어야 살 수 있는 내 처지가 참 서글펐다.

네 딸들과 남편 그리고 내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집은 무덤 같았다. 그래서인지 내 귀를 멀게 한 미운 엄마를, 잊으려 떠나와 더 멀어진 엄마를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엄마는 잊히지 않았고 매일 더 떠올랐다. 들리지 않는 내 왼쪽 귀로 엄마는 늘 나와 함께였다. 아무리 미워도 아무리 못 들어도 잘라내지 못하는 멀어버린 한쪽 귀처럼 엄마는 내 곁에 머물고 있었다. 미치도록 아프게. 십 년 이상 귀에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어쩌다 물이 들어간 날에는 온 집안이 비상이었다. 귓속이 아파서 악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며칠 밤을 지새우며 울었다. 귀가 아파본 사람은 알지 모르지만 네 아이들의 출산보다 그 통증이 더 아프고 괴롭다. 유도분만과 무통주사가 나의 산고를 덜어주었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귀 속 통증은 사람 피를 말린다.


네 아이들이 좋아하는 물놀이를 할 수 없는 것도 귀 수술을 결정한 이유 중 하나였다. 겨울엔 미끄러워 넘어지니 다리 걱정에, 여름엔 물이 들어가면 절대 안 되는 귀 걱정에 딸들과의 추억 속에 나는 없곤 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물이 들어가는 귀다. 일 년에 몇 번씩은 찾아오는 귓속 통증에 괴로운 밤도 더는 싫었다. 그래서 귀 수술에 욕심을 냈다.

넷째 아이의 직수완모를 마치고 종양 제거를 한데 이어 왼쪽 귀의 고막 재생 수술도 서둘렀다. 수면마취를 한 뒤 다섯 시간의 깊은 잠을 자는 동안 귀 밑 머리 쪽에서 떼어낸 살점은 고막으로 안착했다. 고막 재생 수술로 왼쪽 귀의 청력이 백 퍼센트 돌아오지는 않았다. 팔십 퍼센트 정도의 청력만 회복되었다가 지금은 또 나빠졌다. 지금도 왼쪽 귀의 고막엔 작은 구멍이 나 있는지는 모르겠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 말한 의사도 구멍이 남은 원인을 모른다고 했었다. 자연적으로 구멍이 매워지길 기다려보자며 한숨을 쉬곤 했다.


왼쪽 귀가 들리지 않을 때도 10년을 견디고 서로의 의사소통에 언어가 다르다는 것 말고도 커다란 걸림돌이 하나 더 있지만 살아냈다. 차분히 말하며 따뜻하게 대답하자고 연애 때 다짐하고 조율했던 대로는 결코 살지 못했다. 시작은 조용하다가도 정확히 들리지가 않아 눈빛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목소리를 높이며 다툼처럼 대화를 접곤 했다. 의미 파악과 말의 소리 조절을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나의 뇌는 지쳐만 갔다. 이미 결혼 전까지 서른 살까지 빙하 속에서도 썩어가던 나의 전두엽은 정말 쉽게 방전되었고 더 이상 전원을 켜기도 버거웠다.


나는 한국어에 남편은 영어와 불어에 그리고 태어난 네 명의 아이들은 아빠의 언어에 더 익숙해져 갔다. 남편의 한국어 역량과 속도는 연애 때에서 멈추어 있었기 때문에 틀리더라도 내가 생존영어를 해야만 살 수 있었다. 다른 언어를 익히며 타국에서 일상을 일궈가기란 쉽지 않다. 나라는 전두엽 일병은 학습능력도 뛰어나지 않기에 더 어려운지는 모르겠다. 아니 그럴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고 잃어버린 왼쪽 귀의 고막의 틈은 생각보다 깊게 파이고 넓게 벌어진 채 곪아있었다. 그 밤 집안 어딘가로 순식간에 떨어져 나간 고막과 혈액 섞인 진액은 상상보다 너무나 진하게 아직 내 귀에 남아 있었다. 나의 결혼 후 일상 속에 너무 딱 붙어있었다. 한국을 떠나기 전 엄마가 마지막으로 던진 홈런볼을 나는 갖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의 말을 어설프게 이해해 오해하는 날이 많았고 한쪽 청력까지 미약하니 너무나 답답했다. 남편과 아이들은 했던 말을 더 크게 천천히 엄마인 나에게 다시 해 줘야만 했고 점점 내 요청에 지쳐갔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엄마를 이해하고 맞춰달라고 하기엔 하루하루 집안의 데시벨이 높아만 갔다. 내가 꿈꾸고 바라고 기도하던 평안한 대화가 흐르는 집이 아니었다. 정말 아프고 미칠 것 같은 답답함과 괴로움에 곧 불에 타 버릴 듯한 집이었다. 그런 집에서 그래도 15년을 버티며 지내고 있다.


나의 몸과 마음의 십자가의 무게만큼 전두엽은 마치 내 영혼처럼 딱딱히 굳어갔다. 어차피 태어날 때부터 죽어야만 했던 내가 왜 살아서 사람을 사랑해서 삶을 이어가는지 매일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도 한국어가 있는 나의 나라로 가고 싶다. 돈 버는 작가가 되어 남편과 아이들을 맛있는 한국에서 살게 하고 싶다. 이 꿈이 꺾이면 다시 절망하고 날라면과 땅콩을 미친 듯이 입에 넣고는 이미 숨진 전두엽 일병의 심장에 응급처치를 하지 않을까. 기능이 멈춘 전두엽에 아무리 날라면과 땅콩을 주입해 도파민을 생성해도 소용없다. 그 전두엽 일병은 자신을 비하하며 먹는 그 악감정식사 도파민으로는 결코 생명을 구제받을 수 없다. 알지만 안 되는 게 나라서 나의 잘못된 식욕이라서 두렵다. 한국음식을 먹으며 행복하게 사는 날을 꿈꾼다. 먹고 싶은 게 많아 못 죽겠다.


* 신체적 고통과 정서적 원망이 얽혀있는 무거운 마음이 글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진단다.

코딩 닥터에게 감사인사라도 해야 할까.

눈물 섞인 모니터만이 보이는데 또 그 화면 속 글자들이 나를 달래준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은 폐부가 찢기고 피가 마르며 뼈가 사그라드는 고통을 결코 알 수 없다.


당신의 심리와 전두엽의 상태는 '만성적 외상 후 스트레스''자기 비난'이 결합된 과부하 상태로 보입니다.

1. 전두엽의 상태: "통제력의 상실과 인지적 피로"

전두엽, 특히 내측 전전두엽 피질(mPFC)은 감정을 조절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지휘관' 역할을 합니다.

브레이크 고장: 15년 전의 사건이 현재의 통증(물)이나 일상(대화)을 통해 끊임없이 재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전두엽이 감정 뇌(편도체)를 억제하지 못해 과거의 화와 슬픔이 현재형으로 폭발합니다.

인지적 오류: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자책'은 전두엽의 논리적 사고가 '엄마 때문'이라는 과거의 원망에 묶여 현재의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2. 심리적 상태: "신체화된 원망과 상실감"

신체적 상처 = 심리적 상징: 왼쪽 귀의 구멍은 단순히 의학적 문제를 넘어, 엄마와의 관계에서 생긴 '메워지지 않는 결손'을 상징합니다. 귀를 아껴줘야 한다는 마음과 그 귀 때문에 엄마 역할을 못 한다는 자책은 양가감정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정서적 섭식(Emotional Eating): 전두엽이 스트레스를 관리할 에너지를 잃으면, 뇌는 즉각적인 보상을 위해 도파민 수치를 높이는 음식을 찾게 됩니다. 이는 일시적인 처방제일뿐, 깨어난 후엔 더 큰 자책감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만듭니다.

3. 아이들과의 관계에 대한 제언

귀하의 전두엽은 지금 '완벽한 엄마'라는 불가능한 기준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청력이 부족한 것은 귀하의 잘못이 아닌 '신체적 장애'일 뿐입니다.

아이들에게 귀의 상태를 솔직하게 공유하고, 보청기나 음성 증폭기 등 현대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은 자책감을 덜어내는 실질적인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물놀이를 못 해주는 대신, 소리 없이 눈을 맞추는 다른 방식의 사랑이 있음을 전두엽에 인지시켜야 합니다.

과거의 엄마가 준 상처를 '내 아이들에게 주는 미안함'으로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가장 먼저 자기 연민(Self-Compassion)이 필요합니다. 15년을 견뎌온 귀하의 왼쪽 귀처럼, 나의 마음도 그동안 참 많이 애썼음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못 다 쓴 글; 엄마를 미치도록 사랑하지만 밉기도 한, 기쁠 때 웃지도 슬플 때 울지도 못하는 미친 내면아이.

그 아픈 아이를 끌어안고서 하루하루 마흔일곱으로 나는 간다.

엄마가 된 나라는 전두엽 일병, 그 생사의 전투 중인 딸의 마음만은 아무도 모른다.


AI가 제 이모셔널 이팅, 그 현재 상황이 궁금한가 봅니다.

혹시 최근에 이 감정적 폭식이 일주일에 몇 번 정도 반복되고 있나요?


착한 남자와 매일 전투를 치르지는 않아요.

귀를 수술하기 전에는 이토록 괴로운 날들이 그 옛날 엄마처럼 갑자기 불쑥 찾아오곤 했습니다.

서로가 모두 잠잠히 평안히 따스하다가도

잘 들리지 않는 귀로 남편과 아이들의 언어를 제 품에 안아야 할 때

예고 없는 포탄이 제 안에서 제 안에서 터지곤 했답니다. 빠르게는 완전하게는 들리지 않아서요.

자꾸만 계속 매일매일...

그리 자폭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바삭바삭한 과자처럼 나쁜 친구들에게 마구 소총을 겨누곤 했지요.


감사하게도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된 뒤로는 트라우마 다이어트를 하고 있습니다.

느리지만 조금씩 아픔도 자책도 괴로움도 외로움도 서서히 녹고 있습니다.

마음을 글에 녹여 눈물로 닦아내고 하루하루 멀리 보내고 있습니다.

글쓰기를 하다 보면 잠으로 가는 시간이 너무 빨리 옵니다.

더 천천히 저녁이 오고 밤으로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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