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우처럼 걷고 책도 읽고
하정우, <걷는 사람>
표지의 푸름과 하정우가 너무 잘 어울린다.팬미팅에서 권모 씨가 개명하고 싶은데 어떤 이름이 좋겠냐고 하정우에서 조언을 구했다. 권총! 어때요? 아니면 권투?
미안하지만, 영화보다 책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하정우의 유머, 정말 웃긴다.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다 나는 하정우 유튜브까지 검색하게 됐다. 일단 책이 재밌다. 1987, 신과함께, 아가씨, 터널, 암살, 베를린, 국가대표, 추격자 등 상업영화이면서 작품성을 포기하지 않은 그의 영화들과 책의 느낌이 닮았는데, 영화에서 보는 하정우보다 책으로 만나는 하정우가 훨씬 매력적이고 좋은 사람 같다. <걷는 사람, 하정우>는 하루평균 3만 보, 10만 보 까지도 걸어다닌 걷기마니아 하정우의 에세이다. 비행기를 타러 강남에서 김포공항까지 8시간 동안 걸어간 적도 있다.
우선 아침에 눈뜨자마자 곧장 러닝머신 위로 올라간다. 러닝머신을 타고 오십 분 정도를 꼬박 걸으면 약 5천보에서 6천보 가량이 찍힌다. 우리 걷기 멤버들 사이에서는 이 오십 분을 ‘1교시’로 친다. 1교시 오십 분을 걸은 후 십분 쉬는 것이 우리의 규칙이다. 물론 시간과 컨디션에 따라 러닝머신 위에서 2교시까지 마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미 오전 10시에 만 보를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61-62p
나는 하루 1만 보 정도를 걷는다. 지난 토요일에는 바람이 불어서, 하늘이 높아서, 단풍이 눈부셔서, 날이 좋아서 걷다보니 공원에서만 1만 보를 훌쩍 넘겨 최종 2만 보를 찍고 잠자리에 들었다. 기분좋게 많이 것도 온 날은 꿀잠을 잘 수밖에 없다. 걷고 있을 때의 세상과 걷기를 생략한 이동 위주인 날의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 다. 걸을 때는 바람의 감촉, 깡마르거나 무르고 눅눅한 땅의 기분, 하늘의 미세한 온도까지 느껴진다. 봄이면 제비꽃도 보이고 민들레도 보고 요즘은 떨어지는 단풍잎에 쓸쓸하고 허정한 마음을 만리향 달콤한 향이 온몸으로 달려들어 어루만져준다. 지금 동네로 이사한 이유도 탁트인 공원때문이었다. 특히 맨발로 걸으면, 같은 운동장이어도 땅의 울퉁불퉁한 정도나 땅에 박힌 돌의 크기가 다 달라 내딛는 걸음마다 촉감에 다르다. 지루한 틈이 없다.
겨울 제주 올레길 걷기, 새별오름
내가 걷기를 시작한 것 2018년부터다. 대학시절 신문사에서 매주 겪던 원고마감, 일명 데드라인을 매일 겪는 것 같았다. 몸은 피곤한데 머리는 복잡해 밤에는 잠을 깊이 잘 수 없었다. 2017년부터 쌓인 신체적 정신적 피로는 한약으로도 침으로도 나아지지가 않았다.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햇살이 몸에 좋다고 해서 10시부터 12시까지 공원을 걸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설거지까지 집안일을 해놓고 나가는 이 시간을 정말 행복했다. 것디만 하는데 걱정근심불평불만욕심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복잡한 일들은 스스로 정리가 되었다. 걷는 행위가 곧고 단순해서일까. 걷는 만큼 바르고 단순해지는 것 같았다. 시련이 나를 걷기의 세계로 이끌었으니 나쁜 일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때 비해 지금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줄어들어 아쉽다. 오전 10시의 건강한 햇살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특히 더 아쉽다. 책도 읽고 싶고 걷고도 싶을 때, 어느 것이 더 절실한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날은 가끔 책을 읽으면서 걷기도 한다. 유난떤다 싶겠지만 시간이 아쉬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독서와 걷기의 공통점
책에서 좋았던 점을 하나 더 꼽자면, 하정우는 걷기만 하는 인간이 아니라 책도 ‘많이’ 읽는 인간이었다. 걷기 멤버들과 수요독서클럽을, 그것도 일주일에 한 권을 읽는다니 독서일기클럽 멤버로 괜히 동질감까지 든다. 하정우의 독서클럽에서 읽은 <조훈현, 고수의 생각법>도 읽어보고 싶다. 책 읽기와 함께 2만 보는 그냥 걷는, 3만 보를 거뜬히 걷는, 가끔 4만 보도 걷는 나를 떠올려본다. 하정우가 말한 ‘노력의 밀도’를 좀더 발휘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독서와 걷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저는 그럴 시간 없는데요’라는 핑계를 대기 쉬운 분야라는 점이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하루에 20쪽 정도 책 읽을 시간, 삼십 분가량 걸을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206p
세계의 아름다운 도서관에 손꼽히는 타이베이시립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