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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늘 Aug 24. 2023

난데없이 찾아오고
소리 없이 떠나는 허무 씨

삶다운 삶 상상하기

허무는 나에게 꽤 친숙한 단어이자 감정이자 경험이다. 삶에 본래적 의미는 없지만, 인간에게는 의미를 만들며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무의미한 삶을 의미 있게 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인문학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 중요한 능력을 키우는 데 훌륭한 선생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나에게 좋은 글을 읽고, 괜찮은 글을 쓰는 행위는 때때로 찾아오는 허무를 맞서는 믿음직스러운 방어막이다. 읽기와 쓰기는 우선 재미와 자극을 주기 때문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무엇인가 재미있을 때는 허무를 느끼기 어렵다), 더 나아가 의미를 만들고 발견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안목, 관점, 사고력, 감수성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최근에는 아래와 같은 예리한 문장들을 읽으며 자극을 받았다.

가끔 멋진 일이 생기고 난 직후에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일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일들이 생긴 후에 되돌아보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현재가 과거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어쩌면 그 선택들이 지나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의 선택들과 선택의 결과를 서사화하는 방식만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온전한 선택이며, 그게 곧 삶에 대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이 태도는 과거에 대한 기억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개인의 상상력을 결정짓는다." --제현주 <일하는 마음>


물론 읽고 써도 허무는 난데없이 찾아온다. 그러면 힘이 쏙 빠진다. 각종 의욕을 잃는다. (난데없다 느껴져도 알고 보면 무언가가 힘들거나 불만족스러울 때 허무가 잘 찾아온다. 솔닛이 말했듯, 현재가 과거를 재배치하니까.) '삶은 고생이고, 행복은 고작 고통이 완화되는 느낌에 불과한 것이라면, 그럼 왜 살아야 하는 거지?' 이렇게 허무에게 질질 끌리는 나날들이 계속되다가 어느 순간 허무가 소리 없이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최근에 허무가 나의 몸과 마음의 활기를 꺾었을 때 나는 죽음을 다룬 글들을 찾아 읽었다.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일본 고위 관료의 자살을 다룬 히로카즈의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 등. 사실 며칠 전에도 <죽을 이유를 찾아 살아간다>라는 제목에 혹해 일본 소설을 샀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다운 삶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그림이 주는 막연한 느낌이 한 발을 앞으로 어찌어찌 내딛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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