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생존기
나의 10대는 누군가의 언어와 몸짓 하나하나가 너무도 생생해 스치기만 해도 전염이 될까 싶어 조심하던 시절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내 주변 친구들도 나와 비슷했다.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유난히도 부서지는 봄이었다.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00아, 커서 뭐 되고 싶어?'
당시만 해도 '꿈'과 관련된 질문은 주로 뭣도 모르는 꼰대와 같은 어른들의 것이었다. 적어도 그 친구와 나 사이에 '꿈'이라는 것을 언급한다는 건 뭔가 맞지 않은 옷을 걸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넌 뭔데?'
한 동안 말이 없던 친구였다.
그날 유독 친구의 얼굴은 유독 반짝였다.
하지만 이내 친구의 입은 그 반짝임과는 거리가 있는 말을 던져냈다.
'지겹도록 평범하게 사는 거..'
'야!! 그게 무슨 꿈이냐?'
당시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작가가 될 거라며 되지도 않는 꿈을 마땅히 꾸었지만 숨기고 은폐했다. 말하고 나면 쏟아지는 비웃음과 조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밀하게 나는 그 꿈을 붙잡고 있었다. 지금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꿈이 있다는 그 자부심 하나로 그 친구보다 우위에 있다며 내 존재감을 내세웠다. 그런 나에게 그 친구의 꿈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나는 그 친구의 꿈을 비웃고 있었다.
'웃기지?(웃음) 근데 있잖아.. 내가 살아보니까 그게 제일 어렵더라..'
시간이 흘러, 그 친구는 원하던 대로 스무 살에 한 남자의 아내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꿈을 이룬 것이다. 대학에서 실컷 놀고 공부하느라 모든 시간을 보내는 내게 그 친구의 삶은 크게 부럽지도 자극이 되지도 못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집에 놀러 오신 작은 아버지가 농담 한마디를 하셨다.
'00아, 너는 어째 나이 들면서 말이 많아 지냐?'
'말만 느나요? 나이도 늘고, 가진 것도 많아지고, 경험도 많아지고..'
은근슬쩍 놀리던 작은아버지는 멋쩍은 웃음으로 나의 받아침을 넘겨주셨다. 그렇다. 앞자리 3이 되고 나니, 여전한 주변의 자극에 그저 그러려니 하는 여유도 생겼다. 나아가 세상 살이 속 쉬운 것이 하나 없다는 것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은 거의 전무하다는 것도, 그래서 지극히 평범한 삶의 모습 속에 온갖 지혜가 집약되어 있다는 것 또한 배워가고 있다.
피 빨리듯 상사에게 시달려 '억울하면 출세해야지'를 주홍글씨처럼 마음 정 중앙에 새기며 어금니에 힘을 주고 지내던 주중이 지났다. 토요일이었다. 모처럼 미세먼지가 없는 쾌청한 날이었다. 겨울 내 묵혀두었던 이불 빨래를 했다. 건조는 집 바로 밑에 있는 빨래방에서 하자 싶어 내려갔다. 역시나 사람의 마음은 누구나 같은 것이었을까. 주말을 맞아 빨래방은 가족 단위로 이불 빨래를 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쉬고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는 없었다. 5분 정도 기다림 이후 내 차례가 되었다. 30분을 맞추어 놓고 또 다른 기다림을 위해 자리 한편에 앉았다.
평소 꽤 넓다고 생각되었던 그 공간이 그 날은 유독 정 반대로 느껴졌다. 넓지 않은 공간에서도 '나 여기 있지요'하며 숨기 장난을 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는 부모님, 나와 같은 처지에 자취를 하는 싱글족들, 이제 막 건조가 끝난 이불을 탈탈 털어 사이좋게 접고 있는 노부부.. 참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한 그곳을 보며, 섬광처럼 내 머리 속을 스치는 말.
지겹도록 평범한 일상
핑하고 코 끝에 전기가 왔다. 그렇다. 그 친구는 이미 열다섯 그 나이에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그게 제일 어렵더라'
'그게 제일 어렵더라'
'그게 제일 어렵더라'
한 동안 그 한마디가 메아리가 되어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나지막이 담담하게 말하던 그 친구가 내 옆에 잠시 앉았다.
그리고 다정하게 손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 컸네, 내 친구. 무엇이 되지 못해, 누군가의 의미가 되지 못해 발버둥 치지 않아도 돼. 그저 지금 주어진 그 평범한 일상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면 되는 거야... 그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처절하게 투쟁하여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몰라.. 삶에서 '일상'만큼 중요한 것은 그 무엇도 없어... 살아내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이야. 지화자!'
순간적으로 비좁고 불편하게 느껴졌던 그 장소와 장면들이 따스함과 감사함으로 채색되는 것만 같았다. 같은 공간 속 그 사람들 그리고 그 속의 내가 얼마나 최고점의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인지 새로이 느껴졌다. 지겹도록 평범한 일상 그것은 어쩌면 신이 우리 각자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부디, 당신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눈부신 일상 속 평범함을 볼 수 있는 기적으로 가득하길... 멀리서 나의 신께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