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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한달살이 용품
‘나눔’의 방식

너무 가볍지도 너무 진지하지도 않게

by 나나꽃

치앙마이 한달살이를 끝내고 귀국하는 분께 한보따리 생활용품을 얻었다. “받아줘서 고맙!” “살림살이 주셔서 감사!” 서로 고마워했다.


버릴 수 없고, 버리기 아까운 것들을 누군가에게 주거나 팔고 가는 것은 ‘한달살이’의 엔딩. 제법 묵직한 나눔 보따리를 풀었다. 샴푸, 폼 클렌징, 키친타월, 주방세제, 빨랫줄과 빨래집개, 각종 소스와 양념, 과일 칼과 빵 칼, 샤워키 헤드와 필터, 패딩 점퍼(치앙마이에서?ㅎㅎ)……, 내가 쓸 만한 것들을 골라놓고 나머지는 방바닥에 펼쳤다. 사진을 찍어 치앙마이 포털 카페 중고물품 거래 방에 ‘나눔’ 글을 올릴 참이었다. 사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코끼리바지를 동참시켰다(어쩜 그렇게 나한테는 안 어울리는지). 이건 반값이라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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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을 올리자마자 ‘저요!’라는 1번 타자 댓글이 달렸다. 기다리고 있었나? 그 다음에 붙은 말엔 뜨악했다.

‘비대면으로 가져가도 될까요?’

싸가지가.... 불쾌했다. 무슨 죄 졌어? 얼굴은 왜 안 보여주는데? 공짜로 받아 가면 눈 마주치고 인사라도 하는 게 예의 아냐? 대댓글을 달았다.

‘다른 분들을 위해 필요한 물품을 말씀해주시면 좋겠네요.’

곧 샤워기 필터와 굴소스를 받고 싶다는 댓글이 달렸다.

‘네, 내일 오후 5시 반에 뷰도이 일층 로비에 오셔서 가져가세요.’

‘비대면’에 대해선 모른 척했다.


2번 타자는 옷과 된장, 고추장, 칼 등을 받고 싶다고 댓글을 올렸고, 역시 같은 대댓글을 달아주었다.


추적자 본능이 살아난 것은 당일 아침 6시. 컴퓨터를 켜고 1번 타자의 전적을 사찰했다. 역시. 나눔 게시글에 ‘저요!’ 혹은 ‘제가 받아도 될까요?’를 일빠로 남기거나 뒤에 ‘아직 마감 안 됐으면....’ 같은 댓글을 다는 게 습관적이었다. 한달살이의 노하우라면 너무 너저분했다. 1번 타자의 댓글에 악동 같은 대댓글을 달았다.

‘한 가지 궁금한데요, 왜 비대면으로 가져가도 되냐고 물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ㅎㅎ’

세 시간쯤 후 댓글이 달렸다.

‘시간 없음 보통 그렇게들 하는데요.’

싸가지.... 맡겨놓은 거 찾아가심? 기분이 몹시 상해 뒤끝으로 몇 마디 했다.


‘나눔이 그런 거였군요. 저는 한달살이용품 나누며 단 3분이나마 여행 이야기도 나누고 여행자로서의 마음도 나누고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요. 그리고 나눔 글에 자주 "저요" 하고 찾아다니시는 것도 다른 여행자와 만나 잠깐 수다도 떨고 정보도 주고받고.... 그런 이유도 있는 줄 알았네요. 여튼 알겠습니다!’


다음 댓글에 실소가 터졌다. 샤워기 필터와 굴소스 어제 샀으니 취소하겠다고? 누가 봐도 거짓말이잖아! 더 이상 댓글을 잇지는 않았다.


2번 타자는 딱 5시 반에 뷰도이에 나타났다.

와, 그렇게 짧은 시간에 깍듯이 인사까지 챙기며 1분 내에 모든 물건을 싹 가져가는 건 신기에 가까웠다. 댓글로 말한 물품뿐 아니라 테이블에 풀어놓은 모든 것을 준비해온 커다란 가방에 착착착 넣는 모습은 개인기라고 할까. 패딩 점퍼와 코끼리 바지까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1년 넘게 먹을 수 있을 만큼 많았던 된장, 고추장도 이미 가방 안에 들어가고 없었다(한달살이에 5킬로그램은 될 듯한 된장, 고추장을 가져오신 분, 손이 너무 크셨음ㅎㅎ). 덜어 가시라며 용기를 가져오라는 말까지 했는데....


멍해져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2번 타자는 본인이 요리에 쓸 소스들 말고 다른 물건들은 태국인 친구에게 주겠다고 했다. 코끼리바지는 새 옷이니 2천 원만 받겠다고 게시글에 썼는데 4천 원을 주고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오는 사이 휴대폰에 카페 알림이 떴다. 길가에서 찍은 나눔용품 사진과 함께 감사하다는 인사가 댓글로 달렸다. 느려터진 나에겐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무하지?

나를 허무함에 빠트린 건 그들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말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나눔은 순진한 오해일 뿐이었나?

아름다운 소비, 연결, 마음이 자라나는 시간, 아주 잠시인 또 하나의 만남....

꿈 깨세요. 누군가 핏,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나눔은 무슨. 치앙마이 아웃할 때 괜찮은 건 뷰도이 메이드에게 주고 나머지는 그냥 버리고 가라. 정신 차리고.

텅 비어버린 마음, 타닌시장 근처 죽집에서 미트볼이 들어간 흰죽으로 배를 채웠다.


몇 번 생각 끝에 2번 타자에게 진짜 비루한 댓글을 달았다.

‘된장은 좀 덜어서 주시면 안 될까요? 처음부터 덜어드리려고 했던 거였어요.’

나는 된장 마니아고, 홈메이드 된장을 소중히 여기며 전혀 조합이 안 되는 음식에까지 넣어 먹던 참이었다.


2번 타자는 쿨하게 응답했고, 다음날 적지 않은 된장을 덜어 뷰도이까지 배달해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태국 친구가 개발했다는 여성 청결제를 써보시라며 두 개의 신제품까지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곧 빠른 걸음으로 돌아갔다.

처음 보았을 때와 너무나 다른 인상. 사실 나눔 물품을 가져갈 땐 뭔가 기민해 보이고 비즈니스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치앙마이와 치앙마이 사람들을 정말 좋아하는, 동작 빠른 나눔의 중계자 같았다고 할까. 1번 타자와의 안 좋은 경험으로 내 안에 편견의 동굴이 만들어졌었나 보다. 2번 타자도 1번 타자의 다른 버전일 거야....


치앙마이 한달살이 용품 나눔. 1번 타자와 같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백 번 생각해도 싫지만, 서로의 필요에 의한 나눔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는 나의 진지함도 좀 웃겼다. 어느 곳에서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것. 그런 면에서 싸가지 1번 타자의 욕심을 밀어내고, 그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물건들을 나눔의 중계자 2번 타자가 가져가도록 한 것은 꽤 적절한 나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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