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텃밭 농부로서 내 밭에 팻말을 박고 농사를 시작했다.
싱싱이네.
내 밭 이름이다. ‘꿈꾸는 텃밭’으로 하려 했으나, 대부분 자녀 이름을 써 넣은 팻말들 사이에서 튀고 싶지 않았다. 농사는 어리버리 지으면서 이름만 폼을 잡고 있으면 얼마나 우스꽝스럽겠는가. 대신 초록색 유성펜으로 채소 몇 가지를 그려 넣었다. 아마추어 티가 풀풀 나는 내 텃밭을 보고 있던 어느 아저씨 말씀.
“농산물 유통업체 이름 같네.”
빵 터졌다.
별일 아니지만 4월 5일 식목일에 첫 삽을 뜬 게 기분 좋다. 나무를 심기 위한 큰 삽이 아니라 어린 식물을 옮겨심기 위한 모종삽을 오른손에 잡고 상추 모종부터 심었다. 농장 여주인의 코치를 받았는데, 그분도 전문가는 아니라는 걸 다음날 알게 되었다(독학으로 네일아트, 헤어 자격증 따고 그림그리기가 취미라고 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알고 보니 비닐 새끼화분에서 모종을 꺼내는 방법이 옳지 않았고, 무턱대고 파종부터 하는 게 아니었다.
농장에서 흙에 미리 퇴비를 섞어 농사짓기 좋게 만들어놓았다지만, 먼저 갈퀴나 호미, 삽 등 농기구로 땅을 더 고르고 욕심이 있다면 퇴비를 더 섞어 고른 다음 며칠 놔두는 작업을 프로 파머들은 하고 있었다. 밭 가장자리도 반듯반듯 다독여놓았다.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이 얼마나 예쁜지! 실수를 만회하는 방법은 채소 기르기에 정성을 들이는 것뿐이다.
두 번째 날은 종로 5가 꽃시장에 나가 농장에 없는 모종과 씨앗을 샀고, 바로 텃밭으로 가져가 상추 모종 옆에 토마토, 깻잎, 케일, 호박 모종을 심고 열무 씨를 파종했다. 앞으로 나올 새싹을 새들이 쪼아 먹지 않도록 모기장 같은 것을 덮어주었다. 좀 멀리 떨어진 이웃 텃밭 주인이 구경 왔다가 대폭 도와줬다(텃밭에선 농사를 아주 잘 짓는 사람과 아주 못 짓는 사람이 구경거리가 된다).
얕게 고랑을 파고 씨를 뿌린 다음 손바닥으로 살살 흙을 덮을 때의 감촉이 너무나 좋아 간지럼 타는 아이처럼 웃었다.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런 거였어. 장갑은 가져갔지만 끼지 않기로 했다. 모든 걸 맨손으로 만져보고 싶다. 흙 그리고 식물과 더 가까이 밀접하게 교감하고 싶다. 힐링이 따로 있고 칠링이 뭐 특별한 것이겠는가.
처음엔 100평 주말농장 경험자인 엄마를 내 텃밭으로 초대해 코치를 받을 작정이었다. 현재 엄마가 텃밭까지 오갈 만큼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 유튜브, 책, 텃밭 이웃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이번 주말에 엄마가 구경을 오신다는데 엉성한 밭을 보고 얼마나 깔깔대고 웃을지 안 봐도 비디오다.
노련한 텃밭 경력자가 말해주었다. 파종은 시작일 뿐이고 잡초 제거, 북주기, 웃거름주기 등등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요즘처럼 비가 오지 않는 때는 매일 와서 물을 줘야 한다고. 그 말 그대로였다. 이틀 밭일을 한 뒤 어제 하루 쉬었더니 작은 모종들이 ‘나 죽었어’ 하듯 축축 늘어져 보기가 안쓰러웠다. 그래, 부지런히 물 줄게. 예외와 생각지 못한 변수는 있겠지만 사람 아이도, 채소 아이도 최선을 다해야 잘 자란다.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나의 텃밭은 어린아이가 농사짓기 놀이를 한 것처럼 울퉁불퉁하고 허술해 보인다. 하루 한 시간 반씩 이틀. 그 정도 한 것도 나에겐 과한 육체노동이었는지 몸살이 나 하루는 꼼짝없이 쉬어야 했다. 퇴비 섞어 쿰쿰한 냄새가 나는 땅을 만졌더니 피부가 가렵고 눈이 따끔따끔하기도 하다. 이렇게 무력할 수가 있나. 지금은 어깨, 팔, 등 근육이 몹시 시달린 듯 고되지만, 조금 지나면 건강해질 것 같은 내 맘대로의 예감도 든다. 밭일을 한 날부터 꿀잠이다. 적당히, 조금씩, 천천히 하자는 무욕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 밭을 3분의 1쯤 남겨둔 것은 천천히 심을 다른 채소들을 위한 것이다.
비싼 땅 아깝지도 않느냐며 좀 더 촘촘히 심으라고 조언을 하는 이웃들이 많다. 고맙기도 하지만 얼마를 심든 알아서 하게 두면 안 되나, 싶기도 하다. 과한 관심은 아껴두세요, 텃밭 이웃분들. 조금 당겨서 상추 모종을 여섯 개 더 심긴 했는데 이제부터는 정말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내 목표는 ‘농사 성공적으로 해서 수확의 기쁨을 누린다’가 아니라, ‘밭에서 흙을 만지며 내가 가꾼 채소를 먹어본다’니까.
오후 5시경부터 6시 반까지 일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옅은 녹색이 번지고 있는 가까운 산과 진달래꽃 무리를 보는 건 덤으로 얻는 기쁨이다. 날이 더 따뜻해지면 초록은 점점 짙어질 것이다. 텃밭의 식물들도, 산의 나무들도 맹렬히 성장하고 있다. 개인적인 일로, 세상의 일들로 자주 기운이 빠지고 화가 부글부글 끓기도 하고 멈춰서 있기도 하는 나에게 “힘들어도 좀 천진하고 명랑하게 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알았어, 사랑하는 초록이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