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나의 텃밭 ‘싱싱이네’가 있는 농장에 놀러왔다.
이웃을 잘 두어야 한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내 밭을 보고 깔깔 웃을 줄 알았는데 이웃 텃밭 덕분에 나쁘지 않은 평가가 나왔다.
“저 집보단 낫네.”
“하하, 그렇지?”
엄마가 가리킨 곳은 만들다 만 듯한 텃밭도 텃밭이지만 얼마 안 되는 상추가 시들시들 널브러지기까지 해 안쓰러워 보였다. 오는 시간이 달라서인지 텃밭 주인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거기도 물 좀 줘야겠다.”
나는 인심 쓰듯 말했다. 기분이다.
그러는 동안 키가 작고 단단해 보이는 할머니가 농장에 와 우리가 앉은 피크닉 테이블 옆 테이블에 배낭을 부렸다. 인사를 나눈 뒤 할머니는 채소 씨를 가방에서 꺼냈다.
“오늘 처음 왔어요. 친구랑 밭 하나씩 받았는데 친구가 아파서 혼자 하게 생겼네.”
“할머닌 건강해 보이시네요. 식사 하셨어요?”
“집에서 먹고 왔어요.”
할머니와 엄마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젊었을 적 수줍음이 많았던 엄마는 이제 처음 보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말을 튼다. 게다가 10년을 살아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인사나 하는 게 고작인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대자연 속 넓게 펼쳐진 밭에서라면 초면에도 말의 길이 쉽게 나지 않을까 싶다. 주변 환경에 따라 고양이도 될 수 있고 강아지도 될 수 있는 게 사람 아닌가.
할머니가 텃밭으로 간 다음 나는 내 밭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엄마는 테이블에 점심을 펼치고 텃밭에서의 식사 준비를 했다. 잡곡밥과 두부된장, 김치, 밑반찬 두 개. 상추가 아직 덜 자라 상추쌈은 다음으로 미뤘다. 작은 양푼에 밥을 넣고 두부된장으로 비벼놓은 다음 엄마는 농장 구경에 나섰다. 발걸음이 나보다 빨랐던 예전의 엄마 같으면 벌써 팔 걷어붙이고 나섰을 텐데, 이제 무릎 굽히고 쪼그려 앉는 것도 힘들어져 밭일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구경만으로도 즐거운 포지티브형 성격에 감사.
“좋네, 여기.”
어린 채소들이 자라고 있는 농장과 마을을 둘러싼 낮은 산들을 바라보며 엄마가 말했다. 이런 풍경에 흥이 돋는 감성에도 감사.
이 집 부추가 좋다느니 저 집 밭이 깔끔하다느니 하는 엄마의 품평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물탱크 앞에서 건너다보니 엄마는 반대편 모서리까지 가 있었다. 오늘 처음 농사를 지으러 왔다는 할머니네 밭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두 분이 주거니 받거니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였다.
이웃 텃밭까지 물을 주고 할머니네 텃밭으로 갔다.
“얘, 호박 여기다 옮겨 심어도 된단다.”
엄마는 철제 울타리 밑을 가리키며 말했다. 벌써 그 얘기까지 한 거야? 멋모르고 재미삼아 호박 모종을 하나 심었는데, 나중에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밭을 덮을 거라며 지지대를 만들어주거나 농장 가장자리로 옮겨 심어야 한다는 말을 했던 터였다. 일이 잘 되려니 할머니 텃밭이 울타리 옆에 있고, 엄마가 텃밭 구경을 온 오늘 할머니가 농장에 오셨나 보다.
그 사이 다른 텃밭에서 일하던 아저씨가 커다란 물뿌리개 두 개에 물을 담아 왔다. 그러고는 말도 없이 할머니네 텃밭에 물을 주었다. 손가락으로 죽죽 골을 파 씨앗을 뿌린 밭에 골고루 물비가 내렸다.
“아이구, 고마워라. 물탱크가 먼데 이렇게 도와주시니 얼마나 좋아.”
엄마가 할머니보다 먼저 인사를 했다.
비가 너무 안 온다느니, 고구마 농사가 젤 쉽다느니, 들깨 농사가 실속이 있다느니, 세 분의 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또 이어졌다. 엄마는 그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채소가 먹기 좋게 자라면 자주 올 것만 같은 예감. 좋지, 얼마든지!
실은 텃밭 분양을 받고는 ‘텃밭에서 책 읽기’ 모임을 만들어볼까,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 회원 모집은 어떻게 할지도 생각했다. 2주쯤 지나 행동 개시를 하려 했는데…… 그게 얼마나 철없고 한가한 개꿈이었는지, 웃음이 나왔다. 어린 자녀들을 데려와 ‘채소 기르기 소풍’을 즐기다 가는 사람들, 친구들을 초대해 자연 속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차를 나누며 텃밭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 처음 보는 농장 이웃들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텃밭 교감을 하는 사람들……. 내가 보았던 텃밭 즐기기는 그런 모습들이었다. 텃밭을 즐기는 법은 그게 답! 텃밭에서 책 읽기는 혼자서 해보든가. 또 다른 구경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