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주말, 나는 한 모임의 지인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약 네 시간을 보내고는 세탁기에서 탈수된 빨래처럼 기진맥진 지쳐 돌아왔다. 대화가 종종 어긋나고 화법도 많이 다른, 그러나 악의는 조금도 없이 나를 가까운 동생처럼 대하며 그날 나와 하루를 몽땅 같이 보내고 싶어하는 그에게 거절을 못 한 채 네 시간 동안 표정 관리를 하는 데는 남다른 인내가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참을성이 많이 부족한 사람. 결국 세 시간 반쯤 지나 영끌했던 인내심이 바닥나 답답한 속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나는 누구와 친구가 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이에요.
그의 필요에 의한 만남이었기에 주말의 시달림(그렇다, 착하지 않은 나는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에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화가 났고, 그러면서도 내가 했던 말이 악의 없는 그에게 상처가 되었을까봐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고, 또 그러면서도 취미생활을 나와 함께하고 싶다는 걸 한마디로 ‘취미는 각자의 취향대로’라며 거절한 데 대해 미안함과 짜증이 뒤섞였다. 집에 와서도 부대꼈던 하루의 후유증이 계속돼 무엇에도 집중을 못 하고 산만했다.
어둠이 내리기 전 집을 나섰다. 럭비공처럼 방향 없이 튀는 마음을 붙잡아 아래로 내려놓는 데 최고의 명약은 뭐다? 뭐긴, 걷는 것. 기나긴 폭염과 열대야에 산책을 자주 빼먹고 있던 참이었다. 어느 길에서나 도봉산 정상이 수호신처럼 올려다보이는 동네에서의 산책에 맛을 들인 지 얼마 안 돼 불타는 여름이 닥쳐왔고, 더위에 취약한 나는 산책을 건너뛰고 에어컨 바람 속에 하이볼을 마시며 넷플릭스 시리즈 드라마를 보곤 했다.
며칠 만의 산책인가. 발걸음이 계곡을 따라 마을이 이어지는 쪽으로 향했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조금은 선선한 바람이 더운 바람에 섞여 걷기가 아주 힘들지는 않았다. 나의 산책법은 정해진 코스 없이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 여기 와서는 그 산책법이 더욱 좋았던 게, 가로 세로 쫙쫙 줄을 그은 듯 정리된 길보다 오밀조밀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사랑하는 나에겐 너무나 다정한 길들이 나뭇가지처럼 가는 곳마다 뻗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디로 눈을 돌려도 나무가 많은 동네. 폭염의 기습 이전까지, 나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를 매일 마실 다니듯 한 시간씩 돌아다녔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산책길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마음이 소란스러울수록 길은 안온한 얼굴을 해준다. 별것 아닌 사소한 풍경의 길들까지도. 내가 있잖아, 내가 위로해줄게, 하며 나를 맞이한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으면서 내가 걷는 길과 그 길에서 보이는 것들에 감각을 연다. 맑은 개울의 청둥오리와 수심 깊은 곳을 찾아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반지하 방 창틀에 동글동글 이어진 하트 모양의 나팔꽃 이파리들, 마당이 있는 오래된 주택의 기품 있는 대문, 붉은 벽돌 담장을 넘어와 노래하듯 줄줄이 늘어진 넝쿨식물,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오솔길……. 나를 평화로 이끌어주는 사물들이 하나씩 나에게 다가온다. 안에서 부글대던 불순물들이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다.
그래, 내가 사랑하는 것은 이런 것들인데, 겨우 하루의 우발적인 에피소드에 집중하면서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니. 시간과 공간이 바뀌고, 그 시간과 공간에 혼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평온한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혼자 걸어가면서 느끼고 생각하고 감각할 때만큼 온전한 나 자신일 때가 있을까. 고독할 때 가장 안정이 되는, 자발적 고독자로서 나는 혼자 걷는 기쁨에 에워싸인 채 마음 가벼운 걷기를 하고 있었다. 소박한 길들의 두근거리는 박동에 귀 기울이면서.
집에 돌아와 나는 나와 많이 같이 있고 싶고 취미생활도 함께하고 싶은 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최대한 사려 깊으면서도 솔직한 메시지를 좋은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다. 악의 없는 그는 내 마음을 잘 읽은 것 같았고, 모임이 있을 때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자는 데 동의했다. 많이 서운했을 그가 이해를 택하는 결 고운 사람이라는 게 고마웠다. 인내심은 없지만 껄끄러웠던 시간을 다듬는 노력은 해보는 나도 다독이고 싶었다.
걷는 행위는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 같다. 내가 많이 걸어야 하고 걷는 걸 좋아해야 하는 이유다. 나는 품이 넓지 않고 까다롭고 모서리가 많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