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찻잔 속에 가두지 못한 마음

‘지금 여기’가 버거운 당신에게

by Naya


01. 일각의 사치

나는 차를 우릴 때 퍼져 나오는 특유의 향과, 그 시간을 감싸는 정적을 참 좋아한다.

향긋한 찻잎이 뜨거운 물속에서 풀어지고, 투명하던 물이 은은한 수색으로 변해가는 과정. 누군가에게는 지루할 법한 이 시간이 나에게는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가장 우아한 휴식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시간은 여유가 아니라 사치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어도, 차향보다 머릿속의 일들이 먼저 떠올랐다.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내일의 업무는 또 얼마나 남아 있는지.

‘지금, 여기’에 머물고 싶어 찻잔을 감싸 쥐어 보지만, 마음은 여전히 사무실 책상 위를 맴돌고 있었다.


02. 향기가 업무의 소음을 이기지 못할 때

삶이 버거워질수록 역설적으로 차를 우리는 시간은 더 간절해졌다.

그런데 다른 일과들로 내 머릿속과 마음이 가득 차 버거운 날의 차 시간은 어느 순간 고통으로 다가왔다.

“왜 나는 이 짧은 순간조차 온전히 즐기지 못할까?”

차의 향긋함. 차 특유의 떫은맛의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바쁜 일상에 '지금 여기'를 즐기지 못하고, 차 한잔의 여유는 이미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진다.
해결되지 않은 걱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데, 찻잔 속의 고요를 요구해야 하는 것 같은 기분.

나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평온’이 아니라, 거친 풍랑 속에서도 잠시 배를 묶어둘 작은 닻인데 말이다.

아직도 나는 그 닻을 내리지 못한다.


03. 걱정을 찻잔 옆에 잠시 적어두다

나의 고민을 다른 물체가 가지고 있어 준다면 어떨까? 메모에 고민을 적어 나의 무게를 나눈다면 말이다.

"내가 차를 마시는 이 시간 동안은 종이가 내 고민을 대신 지고 있어 줄 거야."

“내가 차를 마시는 이 시간 동안은, 이 종이가 내 대신 고민해 줄 거야. 다 마시고 나면 그때 다시 가져갈게.”

나는 완벽한 여유를 연기하지 않기로 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걱정을 마시지 않는 찻잔 밑에 눌러둔다.

유치하고 단순한 이 선언은 생각보다 힘이 있다. 걱정을 머릿속에서 꺼내 종이 위로 내려놓는 순간, 마음에는 비로소 찻물이 들어올 작은 빈틈이 생긴다. 향기가 업무의 소음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 볼륨을 한 단계 낮춰 주는 것이다.


04. 찰나의 감각, 그것으로 충분하다

2~3시간을 온전히 몰입하지 못해도 괜찮다.
단 15분이라도 뜨거운 찻잔의 온기를 느끼고,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의 무게감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여기’는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다.'

도망가려는 마음을 향기라는 밧줄로 아주 잠시 붙들어 매는 행위, 그 자체에 가깝다.

오늘도 나는 버거운 하루를 마치고 차를 우린다.
여전히 걱정은 내 곁을 맴돌지만, 적어도 찻잔을 비우는 동안만큼은 그 걱정들과 나란히 앉아 향기를 나눈다.

삶의 무게는 여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기를 맡는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내가 다시 나의 주인이 되는 시간일 것이다.


#적어두고 뒤늦게 꺼내는... 여유를 되찾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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