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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by iwasyourone

식장을 계약했다.


“나도 진짜 하는 건가, 결혼을!”이라고 기분을 한껏 끌어올려 보지만 아직 1년이나 남아서 실감은 잘 안 난다. 나중에 결혼하자며 농담하던 연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진짜로 준비를 해 본 적은 없었는데.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애인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사건, 같은 건 없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종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다만 애인에게는 ‘이런 면만 없으면 참 좋겠다’고 바랐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늘 진중하고 배려심 넘치는 모습에 점점 평생 함께 하고 싶어졌다. 만나는 동안 다툰 적도 없어서 싸우게 된다면 어떤 문제 때문일까 궁금하다.


애인을 만나기 직전 오빠들과의 연애에서는(애인은 연하이다) 싸웠다기보다 일방적으로 혼이 났다. 연인 사이에 혼났다는 표현을 쓰지 않지만 나보다 한두 살 많은 그들은 정말로 나를 자주 혼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결혼과는 계속 먼 사이로 남았을 것 같다.


오빠 A는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늘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그 화는 자주 이유 없이 나를 향했다. “너는 생각을 좀 하고 말해.”, “너만 보면 진짜 답답~하다.” A는 나에게 소설 같은 거 보지 말고 재테크해라, 살빼라, 연봉 높은 회사로 이직해라, 정치 성향 바꿔라 등등 원하는 게 많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왜 사귀냐고 했지만 그는 내가 목에 손만 갖다 대도 물을 떠다 주기도 했다. 그렇게 냉온탕에 번갈아 담기는 데 중독되어 있었다.


고백할 땐 나를 2년 넘게 좋아했다고 한 B는 사귀기가 무섭게 나의 단점부터 찾아나갔다. 그 연애는 끝없는 서바이벌 같았다. 그는 다 나를 생각해서 말해주는 거라며 나를 진짜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하곤 했는데 대부분이 나를 분석하는 척 조근조근 까내리는 내용이었다. “나는 너 생각이 너보다 더 잘 보여서 너가 너를 잘 모르는 게 좀 아둔해 보여. 아, 이런 말은 좀 그런가? 근데 원래 속에 있는 말은 다 해야 되는 거 알지?”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떠올린 사람은 민중이 개돼지라던 어느 정치인이었다. 우리 엄마도 나를 다 안다고는 안 하는데. B는 리베카 솔닛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곤 했어서 나는 그가 리베카 솔닛을 어떤 식으로 읽었을지 상상하면 소름이 돋았다. 차라리 안 읽고 추천하는 거였으면 하고 바랐다.


A와 B를 연달아 만나고 한동안 이별의 후폭풍과 나에 대한 실망으로 뒤덮여 지냈다. 걔가 그렇게 말했을 때 왜 참았지? 왜 넘어갔지? 나는 왜 이렇게 남자 보는 눈이 없는 거야? 그들이 떠날 때 그들의 말도 떠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시간이 갈수록 분노만 짙어졌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나는 내가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똑같이 연애할 것 같았다. 세상 살이가, 자기 자신이 괴로워서 저렇게 삐뚤어져 있을 텐데 어루만져 세상에 돌려보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평생 무시받는데 익숙해져 있었어서 무시하는 상대를 되려 이해하는데 도가 터버린 것 같았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몇년 전까지 식구들을 매서운 말로 공격해댔다. 듣는 순간 즉시 잊어버려야 했어서 예시로 들 수 있는 말도 없다. 기분이 좋을 때든 나쁠 때든 가족들을 깎아내리는 말을 함으로써 우월감을 충전하는 듯 했다. 영원히 100%가 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하게. 엄마와 동생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아빠의 공격에 방어할 말을 저장해 놓느라 속이 시끄러워졌다. 다른 사람의 언어에도 민감해져 누군가 별 생각 없이 건넨 말도 공격이 아닌지 의심했다. 타인의 마음을 그대로 받는 데도 서툴렀다.


사람이 이렇게 피곤하게 살다 보면 우울과 슬픔이 디폴트 기분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티내지 않으려고 과하게 명랑해진다. 내가 밝은 줄 알고 다가왔던 사람들은 알면 알수록 우울한 사람이라며 떠나갔다. 이러다 보니 활기가 넘치는 사람은 또 금방 떠날 것 같고 약간 복잡해 보이는 사람이 편했다. 아버지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마침 외모도 내 취향이라면? 나중에 돌아오더라도 일단 그 길로 가야 했다.


내가 자존감이 낮아 A와 B에게 끌렸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사랑의 힘을 과신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사랑을 퍼 부으면 그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나에게 무지 고마워 하고 결국 나 없이는 못 살게 되기를 바랐다. 내가 준 사랑이 돌고 돌아 내게로 돌아온다는 점에서 나도 그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뿐인데. 내가 그 남자들을 바꿀 수 있는 줄 알았으니까.


물론 꾸준한 대화와 노력을 통해서 변화를 이끌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몇년 전부터 아버지에게 하듯이(아버지는 바뀌고 싶은 의지가 강했다). 그러나 나는 미래의 나에게 굳이 이미 겪은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드라마 <스물 다섯 스물 하나>에서 주인공 희도는 평생 일만 하느라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은 엄마를 원망하면서 산다. 그는 오래 짝사랑해온 이진과 마침내 연인이 되지만 이진이 엄마처럼 뉴스 앵커를 하며 밤낮 없이 바빠지자 고민 끝에 이별을 택한다. 이진을 택한다면 얼마나 외로워질지 잘 알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지만 또 긴 덕분에 우리는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잘 안다면 선택을 후회할 일도 적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애인은 말했다.


“나는 민초의 1순위가 언제나 민초였으면 좋겠어. 가족이나 나, 그 누구도 아닌 민초 자신이었으면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나를 내려보지 않았고 바라는 것이 없었으며 그저 나답기를 바라고 있었다. 연애를 많이 해 보라는 조언은 나에게는 딱이다. 먼 길을 돌고 돌아 그에게 도달했으니. 나는 이제 1년 반 넘게 한결같은 한 남자와 가족이 되러 미래로 간다. 그곳에는 서로를 자신만큼 아끼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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