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chid Nov 20. 2016

어느 P.H.D.의 사생활

#1. 오늘도 무사고 안전주행!

**본 이야기는 근미래에 일어날 수 있을 법한 시나리오와 가상의 인물을 바탕으로 한 허구임을 밝힙니다.*



그린라이트가 켜졌다. 그린라이트를 보면 이제 반사적으로 계기판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Tagged: 10 vehicles' 


그새 숫자가 늘었다. 기어를 바꾸고 핸들을 잡는다. 악셀을 부드럽게 밟아 천천히 출발한다. 도로는 한적하지만 언제 어디서 차가 끼어들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해 있어야 한다. 도로 모니터링을 도와주는 ’SENSE’ 시스템이 있지만, 희소는 최대한 자신의 두 눈과 귀에 감각을 집중한다. 


‘삐- ‘ 

내비게이션이 곡선 도로를 알리는 알람을 울린다. 곡선 도로에선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가 그리는 궤적을 따라 10대의 차량의 궤적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가 불안정하면, 뒤따라오는 차량들도 불안정한 운전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그를 믿어주는 만큼, 그는 세심하게 휠을 돌린다. 


군집주행(platooning) 모습. 트럭 운전사는 수동으로 주행하고 뒤따라가는 차량은 자동주행 중.


문희소는 시니어 레벨의 플래툰 헤드 드라이버(Platoon Head Driver)다. 인간 스스로 모든 운전을 다 해야 했던 시절, 평범한 트럭 운전기사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30대 후반 지금에 이르러 스타 드라이버가 되었다. 이제는 화물을 싣고 나르는 수준을 지나 자동차 군집(Platoon)을 이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자동 주행 구간이 정해지고, 자동 주행 모드로 운전하고자 하는 차량은 PHD뒤에 '태깅(tagging)'되어 주행한다. 개별 차량 스스로도 자동 주행이 가능하지만 수동 주행 차들과 섞여 있어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탑승자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제안된 시스템이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플래툰 주행에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플래툰에 속해있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플래툰을 이끄는 든든한 리드 드라이버들이 있기에 사람들은 자율주행이 편리하고 쓸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더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희소는 PHD 중에서도 스타 드라이버다. PHD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윤리시험, 반응 속도 시험 등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고, 침착하고 차분한 성격 덕에 누구보다도 안정적인 주행을 할 수 있는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가 곡선로를 운전해 나갈 때면 연신 '좋아요'를 눌러댔고, 갑작스럽게 장애물이 튀어나와 줄줄이 접촉사고가 날 수 있었던 때에도 적재적소에 적당히 브레이킹을 하는 그의 계산된 민첩함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딩동 - 고속도로 A구역 진입 완료- '

본격적인 자동 주행 구간에 진입했다. 지금부터는 뻥 뚫린 직선 도로가 계속되기에, 희소는 한 숨 놓는다. 그와 동시에 센터패시아에 위치한 '운전자 상태' 알림판을 흘끗 확인한다. 상태 표시판엔 양호함을 나타내는 초록불이 켜져 있다. 여러 사람의 목숨을 책임지는 만큼, PHD들은 자신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도록 훈련받는다. 상태 표시판에 빨간불이 들어오면 플래툰에 속해있는, 뒤따라 자동 주행하고 있는 차들에 '플래툰 해제'를 요청하고, 5분 안에 완전히 플래툰을 해제한 뒤 근처 휴게소로 가서 필수적으로 잠을 자거나 적절한 휴식을 취해야 한다. 플래툰과 관련된 법은 그 어느 도로교통법보다 엄격하며,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휴직을 당하거나 심하게는 운전 자격을 박탈당하게 된다. 



'딩동 - 근처 플래툰 감지 - 헤드 드라이버 라이언 윈드 -'

근처에 다른 플래툰이 있다는 안내 목소리와 함께 윈드실드에는 라이언 윈드의 얼굴이 떴다. 그와 동시에 라이언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문, 여전히 개미처럼 느리군. 오늘도 안전주행 부탁해. "


차창 문 너머로 라이언의 선글라스가 반짝, 빛난다. 재수 없는 자식. 미국 출신의 포뮬러 원 선수였던 라이언은 선수직을 은퇴하고 한국으로 와 플래툰 운전자가 되었다. 미국에서 수동 주행이 금지된 후, 운전이 삶의 전부였던 그는 실제 도로에서 운전하고 싶어 플래툰 인프라가 잘 되어있는 한국을 찾았다고 했다. 아직 주니어 레벨인 그는 시원시원한 차 간 거리를 자랑하는 스피드 레이서다. 포뮬러 원 시절의 명성을 타고 비교적 빠르게 플래툰 드라이버가 된 그는 속도감 있는 주행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빈정대는 성격만 아니라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 법도 하건만, 희소는 라이언의 플래툰이 지나갈 때면 괜스레 짜증이 난다. 


'Vehicle Out'

'Vehicle Out'


라이언이 지나가자 속도감에 매료된 사람들은 희소의 플래툰에서 빠져나가 라이언의 플래툰에 진입한다. 윈드실드에 뒤따라오던 차량 2대가 빠졌다는 메시지가 떴다. 뭐, 별거 아니라곤 말하지만 실은 괜히 신경이 쓰인다. PHD의 연봉 결정에 중요한 지표 하나가 '팔로워 수'이기 때문이다. 즉, 희소의 플래툰에 참여했던 차량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연봉이 올라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희소는 매번 라이언의 등장이 탐탁지 않다. 짜증이 날 땐 라디오 만한 게 없지. 통신상황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는 PHD에게 교통상황정보 채널은 라디오를 켜면 디폴트로 나오게끔 설정된 채널이다.


'현재 영동고속도로 A구역 A-23 지점 근처에서 사고차량 세 대가 보이는데요, 자동 주행 차량과 플래툰 드라이버들은 이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곧 있으면 A-23 지점이다. 가장 끝 차선으로 주행하고 있던 희소는 정신을 차리고 차선 변경을 할 준비를 한다. 좌측 깜빡이를 켰다. 뒤따르는 차량들의 윈드실드에 좌측 이동 사인이 떴다. 플래툰 전체가 차선을 변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희소는 더욱더 집중한다. 옆 차선이 한적하게 비어있고, 수동 주행 차량이 길을 양보해줘야 가능한 일이다. 다행히도 옆에서 달리던 수동 주행 차들은 희소의 좌측 깜빡이를 감지하고 다른 차선으로 비켜준다. 그를 틈타 희소는 부드럽게 핸들을 돌려 차선 변경에 성공한다. 태그 되어 따라오던 차들도 하나, 둘 차선을 변경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사고 지점에 가까워서인지 도로가 번잡해지기 시작했다. 끝 차선에서 달리던 차들이 모두 옆 차선으로 우회하느라 벌어진 일이다. 행여 뒤따라오는 운전자들이 짜증이 날까 걱정된다. 오랜만에 희소는 마이크를 잡았다. 자신을 믿고 태깅 한 운전자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기 위해서다. 


"안녕하세요, 문희소입니다. 현재 A-23 지점 끝자락에 사고차량이 줄지어 있는 상황입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고 차들이 빠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곧 도로가 뚫릴 예정입니다." 

희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좋아요'가 날아온다. 좋아요 하나가 날아올 때마다 희소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운전자들과 소통하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 이 일의 보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오늘도, 무사고 안전주행!




(다음 편에 계속...)




**Platooning: 군집 주행. 차들이 기차처럼 붙어서 주행하는 형태. 자율주행, 커넥티드 카 개념과 함께 등장하였다. 자동주행을 할 때 선행차와 거리를 유지하며 추종하는 방식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며 물류의 효율화, 운전기사의 피로도 감소 등을 목적으로 고안된 시스템이다.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구글 검색을 활용하시길...


이미지 출처:

http://www.autoblog.com/2012/01/24/sartre-autonomous-road-train-enters-final-phase-with-trio-of-vol/

매거진의 이전글 About Small Science Fictio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