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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Oct 30. 2022

같이 책을 읽는 벗


책을 쓰고 나서 글을 쓰는 것과 미술 작업을 하는 것의 차이를 묻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미술 작업으로 글을 쓸 때도 있지만, 전시장 안에서 보여주는 글과 밖에서 출판하는 글은 여러모로 다른 것 같다. 무엇보다도 크다고 생각하는 차이점은 작가와 관객, 혹은 독자와의 거리라고 하겠다. 이미지로 소통하는 미술은 대부분 시적이고 함축적이다. 특히 현대미술은 대상을 재현하려는 전통적인 미술을 반성하고 넘어서려는 시도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미술적 경험이 많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낯설고 불친절하게 보이기 일쑤다. 반면, 책은 미술에 비해 훨씬 구체적이고 설명적이며 누구에게나 익숙한 매체다. 독자는 책을 손에 꼭 쥐고 자신의 팔 길이 보다 짧은 거리에 두고 읽을 수 있으며, 가장 편안하고 사적인 장소로 데려가 기꺼이 쓰다듬고 줄 칠 수 있다. 아무래도 책을 읽는 독자들이 현대 미술을 관람하는 관객보다 작가를 더 가깝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 역시, 미술 관객들 보다 편하게 다가오는 독자들에게 좀 더 친밀감을 갖곤 한다. ‘서촌 그 책방’에서 만난 독자들에게도 동글동글하고 따뜻한 감정을 느꼈다.      

‘서촌 그 책방’의 독자들을 만난 것은 불과 한 달 전으로, 두 번째 책 <이름 없는 것도 부른다면>의 북토크를 했던 날이었다. 이메일 주소 착오로 여러 번 엇갈린 끝에 토크 요청 메일을 받았었다. 행사가 있던 날, 서촌의 좁은 골목에서 책방을 발견하자마자 그 메일이 결국 나에게 닿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서촌 그 책방’은 3년 전쯤 골목 책방을 소개하는 EBS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봤던 바로 그곳이었다. 방송에서 인문학자 고미숙 선생님이 책방을 소개하는 장면 너머로 나의 첫 책 <태도가 작품이 될 때>가 배경처럼 언뜻 비쳤더랬다. 책에는 포스트잇과 북 마크가 잔뜩 붙어 있었는데, 누군가 내 생각을 그렇게나 열심히 읽어 준다는 사실에 몹시 감동을 받았었다. 당시에 처음으로 책을 내고 나름 긴장을 하고 있던 터라 더욱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서촌 그 책방’이 ‘바로 그곳’ 임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작고 단단한 책방은 잠깐 봐도 잊을 수 없고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밖에 없다. 책방에 발을 들여놓기 열 걸음 전부터 마음이 이미 활짝 열려 버렸다.     

북 토크를 시작하면서 메일을 제대로 받았다는 사실에 다시금 안도했다. 작은 책방을 꽉 채운 책방의 독서모임 회원들이 보여준 나의 나직한 책에 대한 관심이 몹시 다정했고, 질문이 유달리 촘촘했기 때문이다. ‘서촌 그 책방’의 독서모임이 절대 허투루지 않으며, 진심과 열정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 수 있던 시간이었다. 미술 작품에 대해 틀린 해석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 대화를 나눴던 것도 인상적이었고, 책의 어조가 너무 단정적인 것 같아서 좀 더 열린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바로 이해해주시는 회원들의 마음도 더없이 좋았다. 생명을 담은 책을 내기 전에 죽음에 대한 글쓰기를 시도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던 분의 적극적인 관심도 즐거웠고, 두 번째 책이 첫 번째 책 보다 어려운 것 같아서 고민이라고 하자, 두 번째 책이 더 좋았다고 해주신 또 다른 분의 응원도 든든했다. 오랜만에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등받이도 없는 의자의 불편함을 참고 두 시간 넘는 시간을 내리 함께 해주신 ‘서촌 그 책방’ 독서모임 회원들의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토크가 끝나고 가진 다과시간도 특별했다. 여럿이 조금씩 음식을 가져와서 나눠 먹는 자리였는데, 사장님의 감자 샐러드랑 당근 레페는 부드럽고 상큼했으며, 회원 한 분이 슬며시 올려놓은 수제 피클도 아삭하니 맛있었다. 그날 책을 가운데 두고 독자들과 같이 보낸 시간은 감자 샐러드와 피클, 레페의 따뜻한 질감과 단 맛으로 마음에 깊이 남았다.       

메리 앤 섀퍼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 클럽>은 이차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한 유일한 영국 영토였던 건지 섬 사람들의 얘기를 서간문의 형식으로 담은 소설이다. 런던에 사는 작가 줄리엣과 건지 섬에 사는 북클럽 회원이 책에 대한 편지를 교환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사람들은 줄리엣에게 어둡던 시기에 같이 책을 읽고 음식을 나누는 것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었는지 얘기해 준다. 줄리엣 역시, 책을 읽으면서 마음을 채우는 건지 섬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느끼며 그들의 사연을 글로 옮긴다. ‘서촌 그 책방’ 사장님이 책방의 독서모임에 대한 글을 부탁하셨을 때, 나는 곧장 섀퍼의 소설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 클럽>을 떠올렸다. 책방의 독서모임 회원들 간의 둥근 관계와 내가 회원들에게 느꼈던 뭉클한 감정이 소설 속 인물들의 것과 닮은 구석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줄리엣은 도시에게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라고 쓴다. ‘서촌 그 책방’의 독서모임 회원들을 찾아간 내 책의 귀소본능을 칭찬하고 싶다. 같이 책을 읽으며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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