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시작이다. 두 달이면 끝난다던 우리 집 공사도 여섯 달도 넘게 이어져 기진맥진했었는데, 직후 시작된 옆집 한옥 공사가 끝나자마자 2017년 여름 그 이웃 집도 공사를 시작했다. 동네에선 제법 규모 있던 35평 한옥에는 독거노인을 비롯 다섯 가구가 촘촘히 모여 사셨는데 가까이 또 멀리 흩어지고, 안쪽으론 영화사가 길가론 서점이 들어온단다.
서점이라고? 동네서점은 교보문고로 충분하지 않나? 고작 걸어서 15분이면 도착하는 교보문고 광화문점이 있는데, 이 좁은 골목길에 서점은 왜 또 생기는지. 지난번 그 맞은편 LG네(집주인이 LG 다닌다고 알려져 우리 내외가 붙인 이름) 지하에도 서점이 들어왔었는데 이웃이라 한번 가보니 달랑 한 달에 책 한 권을 선정해 그 책만 냅다 들이 파는 서점이었다. 때마침 지하에 빗물이 들어차 선지 금세 비워졌는데, 이번 서점은 얼마나 버틸지 싶다.
2017년 가을 문을 연 서점은 조용하다. 간판이라곤 초등학생이 쓴 듯한 ‘책’이라는 한 글자가 어중되게 붙었고, 유리문 옆으로 ‘서촌 그 책방’이라는 작은 타이포 시트지뿐. 다만, 밤마다 따스한 전등 불빛이 소곤소곤 책 이야길 하듯 새어 나온다. 겨울을 무사히 잘 버티고 2018년 새해가 되니 조금씩 우리와 가까워졌다. 옆집은 밤에 눈만 붙이러 들어오시는 식당 쥔장이니 기실 빈 집이고, 서점이 실상 옆집인 셈.
2018년 어린이날을 맞아 벼룩시장을 벌였다. 좁은 골목이 집과 서점 사이에서 넓어져 작은 광장이 되는 형태임을 핑계로 일을 벌인 것. 유진 군도 4학년이 되면서 친구들과 몰려와 골목에서 야구니 축구니 시끄럽게 뛰어다니는 일도 많아져 골목이 익숙해진 탓도 있었다. 우리 집 물건들은 정리벽 환자인 처로 인해 탈탈탈 털렸고, 북촌 보리네와 제스빈티지 등 기본 셀러도 확보했다. 무뚝뚝한 서점도 책과 천가방, 엽서 등을 판매하기로 하고 포스터도 써서 우리 집과 서점 대문에 붙였다. 행사일은 쾌청했고 또 북적였다. 행사 내내 수굿이 앉아 꽃을 그려주던 동네 옥상 화가 김미경 샘은 석양을 배경으로 멋진 춤으로 행사를 마무리했다.
그 무렵부터인 듯, 서점 앞 계단에 화분이 하나둘 늘어갔다. 여름을 지나며 에어컨 실외기 앞에 플랜터 박스도 생기고 바늘꽃을 비롯해 다양한 꽃들이 심겼다. 처가 역점으로 가꾸기 시작한 우리 집 대문 앞 화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이 맞았다. 종종 서점을 오갔는데, 10월 하순 어느 날 시 읽는 밤 행사를 한다며 참가를 권했다. 산문형 인간이라 떠오르는 시가 없어 마침 책방 주인장이 추천한 노르웨이 농부시인 올라부 하우게의 ‘푸른 사과’를 꼽아 참여했다.
“여름은 가고 추웠고 비가 많았다 / 사과가 푸르고 시다 / 그래도 사과를 따고 고른다 / 상자에 담아 저장한다 / 푸른 사과가 / 없는 사과보다 낫다 / 이곳은 북위 61도이다.” 독서모임 회원과 서점 단골 고객은 물론 서점 주인과도 더 가까워졌다.
두 번의 겨울을 같은 골목에서 보내면서 서점 주인장과 우리 가족 무시로 오갔다. 봄을 기다리며 햇살 좋은 우리 집 쪽마루에 앉아 한참 이야기 나눈 기억도 생생하다. 보름간의 가족 여행 기간에는 책방에 열쇠를 맡기고, 마당의 식물 관리를 부탁했다. 인연이라는 것이 그렇듯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2019년 7월 우리는 그 골목을 훌쩍 떠났다. 이젠 예전에 살던 골목이 되었고, 우리 집이 없어졌다.
참 이상하게도 이후론 서점에 더 자주 들르게 되었다. 임시로 이사한 동네엔 당근 마음을 붙일 수 없어, 자주 오가며 책도 무시로 주문했다. 2020년 2월 북촌으로 완전히 이주했지만, 마음은 서촌에 많이 남아 있었던지 아주 이주하려면 한참 걸릴 듯했다. 예전 우리 집 마당에서 마시던 술자리는 주로 근처 단골 술집들이, 가끔은 책방 큰 테이블이 받아주었다. 11월에는 영광스럽게도 졸저 ‘2050년 공원을 상상하다(한숲)’ 저자와의 대화가 책방에서 열렸다. 이날도 독서모임분들이 많이 참여해 주셔서 마음 빚이 쌓였다. 서로 쌓은 빚들이 조금씩 빛을 발하며 북촌과 서촌을 잇는다.
단골 책방이 있다는 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것이다. 단골 책방이 가까이 있다는 건 그 친구를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의미다. 책에 관해 이야기 나눈다는 건 벌거벗고 사우나를 함께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골 책방이 가까이 있다는 건 거의 집에 사우나 시설을 갖춘 셈이다. 혹여 그 사우나에서 술잔이라도 기울인다면, 그걸 천국에 비길까?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