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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이 책은 어떤 지식을 주는 내용이 아니다. 한 건축가가 자신의 고향인 서울에 대해 쓴 글이다.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집에서부터 자신이 다닌 학교들, 다른 나라에 산 경험들, 그리고 건축가로 자신이 설계한 집에 대한 느낌을 기록한 것이다. 재미있는 내용에 끌려가다가 잠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우리가 이 사람의 얘기를 왜 읽어야 하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서평에도 그런 불만이 있었다. 정말 그럴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지금 우리는 모두 서울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서울에 대해 할 얘기가 많다. 이 책은 마중물 역할을 충분히 한다. 서울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때로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끝없는 애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우선 저자를 따라 둘러보는 곳곳이 참 재미있다. 아니 이런 사연이 있는 곳이었나. 새삼 흥미가 생기게 된다. 자신의 경험에 건축학적 지식, 왕성한 탐구력으로 역사적 배경까지 덧붙여주니 얘기가 풍성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만치 않은 저자의 글솜씨도 단단히 한몫을 한다. 그의 얘기를 듣다 보면 서울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생기고 안목이 넓어지기고, 그곳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그래서 동대문 시장이나, 서울 성곽, 통의동 그의 사무실까지 가보고 싶어 진다.


일차적 목적은 서울에 대한 이해이지만, 이 책을 추천한 이유는 따로 있다. 나를 되돌아보자는 것이다. 저자만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 이런 책 한 권쯤은 풀어낼만한 사연을 갖고 있다. 처음 태어난 곳은 어떤 곳이었나? 내 부모님은 왜 그 집에 사셨나? 그 집에 살았던 기억을 되살려 보자. 혼자 해 보다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오랜만에 형제들과 모여 그 집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 아직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면 물어보아도 좋다.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가 어린 영혼이 되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순수를 회복해 보는 시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 박웅현이 말한 행복은 감상의 폭이고, 순간이라는 말에 동의하게 되지 않을까? 사람의 힘, 감탄의 힘, 기쁨의 힘이 대화 속에서 넘쳐날 것이다. 숨겨진 촉각을 다듬어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한옥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내 의식의 저편에 숨어 있었다는 점이다.
다락은 바닥에 창이 낮게 붙어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오는 빛의 느낌이 다른 방들과 달랐다. 나는 고래 뱃속에 들어간 요나처럼 그 서까래들을 세어보며 다락에 틀어박혀 장난을 치고 놀았다. (서문)

-(내 감상) 우리 모두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한옥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아파트에 산다. 잊고 있던 공간, 옛 우리 집, 다락, 서까래까지 새록새록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옛 사진을 보면서 건물에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은 좀 이기적인 동물이어서 사진을 볼 때 대부분 자신의 얼굴만 본다고 한다. 책은 발상의 전환을 도와주는 좋은 도구이지 않는가? 이번에는 사진 배경의 건물이나 장소를 한번 들여다보라 참 재미있는 사실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의문점이 생기면 형제자매나 부모님께 질문도 잊지 말 것. 그 시간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상대방의 배우자에 대한 이런 접근도 대화의 물꼬를 트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내가 모르는 배우자의 어린 시절이 밝혀질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사진이 없다. 둘째 딸로 태어나 별 환영을 받지 못했음이 여실히 증명된다. 시골에서는 아주 중요한 날에만 사진사가 출장 촬영을 했는데 그때도 엄마는 언니와 남동생을 안고 사진을 찍었다. 그들의 사진 배경으로 내가 잠시 등장한다. 여러 명이 같이 찍는다고 사진 값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나만 뺐느냐고 항의한 적도 있다. 조금 더 자라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는데, 너무 촌스러워 저게 정말 나인지 의아하기도 하다. 남동생과 결혼한 올케가 어느 날 사진 속 계집아이를 가리키며 내게 물은 적도 있다. ‘형님, 이 촌스러운 여자애는 누구예요? 그게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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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어린 시절 내 기억 속 최초의 집은?

-그 집의 공간 배치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라.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곳은 부모님께 야단 맞고 자주 찾아갔던 곳은? 나만의 비밀장소는? 그 집이 내게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나는 옥매 화가 핀 단목 집이 떠오른다. 엄마와 땅콩 줄기를 따며 백설 공주 동화를 들은 기억도 있다. 막냇동생이 태어난 날의 새벽도 기억난다.


*질문:타일을 처음 본 곳은 어디일까?

-분명 한옥에는 타일이 없다. 주로 나무와 흙과 돌로 이루어진 집이다. 그래서 타일은 이국적인 재료이다. 요즘 TV 속에 등장하는 북한이나 고려인의 한옥을 보면 부엌에 타일이 많이 보인다. 일종의 절충식 한옥의 모습이다. 타일을 본 건 아마 진주의 공중목욕탕에 갔을 때 일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진주 나들이였다. 그리고 대곡 집 우체국의 바깥 마감으로 군데군데 타일이 붙어 있었다. 작은 손톱 크기의 하얀 타일. 그리고 이스탄불에 갔을 때 데칼코마니의 재료가 타일이라는 점이 정말 놀라웠다. 얼마나 다양한 색이 있는지. 지상의 모든 색이 타일로 재현된다는 게 믿어지는가? 그들 문화의 우월성을 타일이 증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또 있단 말인가?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그만큼 좁은 세상을 산다. 그런데 새로운 동네들이 내 친구들을 마구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2층 내방 창가에 앉아서 저 산 너머 어딘가에 있을 그 여의도와 강남이라는 곳에 대해 상상하곤 했다.

-친구를 떠나보낸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내가 가 본 적이 없는 곳으로 가버린 친구를 그리며 우리는 자주 상상의 날개를 펼치곤 한다. 그리고 고3 무렵 서울 진학을 꿈꾸며 상상한 서울의 모습도 기억에 남아있다. 책에서만 보아온 서울의 모습과 실제의 서울은 많이 달랐다. 그들의 남루가 낯설었다. 하숙집 할머니의 비정함과 동대문 시장에서 처음 가방을 사고 쓴 바가지 때문에 펑펑 눈물을 쏟은 기억이 새롭다.

나는 주로 떠나가는 사람이었다. 남은 친구들에 대한 기억이 아주 많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낯선 곳에서 사는 일은 참 견디기 힘들었다. 모든 것 뿌리치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 회한을 편지로 쓰곤 했지만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서 무디어지기 시작했다. 현재를 살아갈 뿐 어떤 관계에도 애틋함이 없다. 너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비애이다.


나는 건축가의 작업이 근본적으로 자기가 성장하고 일하는 지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동네라는 특수성을 바탕으로 세계라는 보편성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동네는 세계로 가는 창구일 수도 있다. 이전의 추상적인 전통 건축론과 다른 점은 사변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의 작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실과 역사에 대한 자세하고 차근차근한 관찰과 분석 그리고 경험을 전제로 한다.

_우리의 독서모임에도 이 이론이 근본적인 틀이었다. 그래서 멀리 다른 나라의 얘기보다는 우리 저자의 한글 책을 기본으로 한다. 번역서보다는. 바로 동네의 특수성을 먼저 파악하고 세계라는 보편을 이해하는 잣대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예일대학의 건물들은 마치 양파처럼 보이지 않는 수많은 층들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도서관의 경우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개가식 서가의 입구를 찾기가 어렵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들어가려는 공간의 규모에 맞는 문을 설계한다는 상식이 여기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배치는 다소 의도적인 면이 있다. 찾으면 열리고 열리면 찾는 자의 것이지만 찾지 않으면 영원이 그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채 학교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너무 뻔하지 않아서 흥미롭다 이런 장치를 둔다는 설정이. 우리는 대학에는 이런 은밀한 즐거움이 숨겨져 있지 않다. 대학 문을 밀고 들어오는데 모든 힘을 소진해 버린다.


우리의 학교는 마치 단독주택처럼 관공서처럼, 기업체의 사옥처럼 그리고 군대의 병영처럼 자신을 그 주변과 확연히 단절하고 싶어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우리나라 학생들의 건축에 대한 접근이 유독 관념적이고 피상적인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학교의 교육 환경과 관련 있는 건 아닐까 자문한 적도 있다.

-우리 건축의 특색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위의 단체가 모두 한 곳인 듯 비슷한 속성을 갖고 있다. 적어도 학교만은 그 그룹에서 탈퇴해야 하지만, 묶어두어야 관리하기 쉽다는 명목으로 같은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학이 담장을 허물기 시작했다. 커리큘럼이나 집행방식의 가시적인 변화는 거의 없어 보인다. 총장 직선제 폐지 등을 보면 오히려 보수적으로 회귀하는 느낌이 든다. 담장은 허물었지만 마음의 벽을 높이 쌓은 꼴이다. 우리나라에 살면서도 우리 것에는 관심이 없다. 코즈모폴리턴이 되려고만 할 뿐이다.


결국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학교는 도시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하며 도시는 학교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학생이나 교수는 결국 시민이며 인간이다. 그리고 학교는 사회의 일부이다.

-모든 공간이 땅값 이론으로 매 김질 하는 우리 사회가 슬프다. 특수학교의 이전을 둘러싸고 주민과 갈등을 겪는 것을 보는 건 최악이다.


항상 역사는 누군가 다른 사람이 기록하는 것이려니 했는데, 이제 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 모두 그간의 궤적을 그려보자. 말로, 또한 글로, 사진으로, 모두 가능하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기록만을 단순히 구경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나를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이상의 시 오감도에 나오는 ‘막다른 골목’은 기본적으로 중세도시였던 서울에서도 가장 전근대적인 요소의 하나였다. 권력에 의한 도시구조의 왜곡이라는 현상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벗어날 길 없는 자신의 답답한 심정, 거의 공포에 가까운 탈출 의지와 그 좌절의 심정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저자는 건축과를 나온 이상의 시를 보며 일종의 동류의식을 느낀 듯하다. 또한 거주지도 가까운 곳이어서 더욱 감정이입이 쉽지 않았을까? 이상에 대해 무한한 공감과 측은함을 느꼈다고 저자는 말미에 기록했다.


우리의 지적 호기심은 그 임계점을 지날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일종의 지식과 정보의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영추 포럼은 미약하지만 그러한 사회의 변화를 앞당기는 기폭제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그 폭발의 힘으로 저 멀리 우주 어딘가로 날아가고 싶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영추 포럼이다. 자기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사람들을 모으고, 모임을 만드는 것이 흥미롭고 부러웠다. 내가 꿈꾸는 또 다른 영추 포럼은 어떤 모습일까? 여러분은 또한?


통의동을 품고 있는 인왕산 기슭은 조선 후기 여항문학의 산실이다. 그들은 상당한 자본을 축적했고, 무엇보다 양반 못지않은 문화적 역량을 확보했다. 그중에서는 조선 사회에 대한 치열한 비판의식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사회적 역할을 자각했을 때는 누구보다 강력하게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논문을 통해 또는 시를 통해 드러낼 수 있었다. 또한 지극히 이기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김수철 관련 글을 쓰면서 여항 문인들의 삶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다. 양반 못지않은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지위는 여전히 중인 계급일 뿐이었다. 문화적으로는 훨씬 우월한 심미안을 갖춘 사람도 있었다. 김수철이나 조희룡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깐깐한 사대부들은 그들의 예술 감각을 문기가 결여된 손재주 정도로만 폄하했다.


거대한 구조물만 지어놓고 운영이 부실하거나 그 안을 채울 내용이 빈약한 경우가 너무도 많다. 그래서 나는 공공기관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하게 뜸을 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일정에 맞추기 위해서, 혹은 부처 간 경쟁심으로 인해 무리하게 졸속으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시민들이 먼저 의견을 내고, 문화예술인, 전문가들이 개입하여 논의를 풍부히 하고, 사회의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논의가 무르익어 결국 구체적 실현 단계가 되었을 때 정부가 이에 화답하고 협조하는 방식은 과연 요원한 것인가? 우리는 아직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식의 관주도형 사회에 익숙해져 있는 것일까?

-이런 방식이 주류로 인식되는 사회에 아직 살고 있다. 그걸 빤히 바라보면서도 반대할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그렇게 하도록 적극 도와주기도 한다. 언제쯤 시민이 주도하고 정부가 경청하는 사회가 될까.


정치가나 공직자들이 먼저 이 문제에 대한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건축가들은 오로지 도구적 기능적 존재로서 이미 다 결정된 일을 수행한다고 본다. 나는 이 과정이 역전되어야 한다고 본다.

_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주된 주장이다. 서울 이곳저곳을 애정 어린 눈으로 돌아다녔다. 그 와중에 그는 얼마나 많은 울분을 삼켰을까. 그리고 내린 결론이다. 대한민국의 건축가로 살아가는 일의 비애가 스민 한 마디인 것이다.

누구나 이런 책을 쓸 권리가 있다. 사람 숫자만큼의 도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도시는 하나일지 모르지만 각자가 경험하는 도시는 천차만별이다. 글을 쓰는 속도가 서울이 변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느낄 정도로 서울은 빠르게 변해갔다.

-내가 이 책을 추천한 이유가 맺음말에 나와 있다. 모두 자신의 그곳을 써 보자.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나요. 나에게 서울은 어떤 곳인가? 책에 소개된 장소 중 나와 관련 있는 곳은? 가 보고 싶은 곳, 확인해 보고 싶은 장소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만족하나? 내가 산 집 중에서 잊을 수 없는 곳은? 나는 어떤 곳에서 어떤 집을 짓고 살고 싶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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