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을 하고 싶다 생각한 것은 좀 되었다. 좋은 책들이 모이면서 이걸 제대로 활용할 방법은 없을까. 더 구체적으로 골몰하게 되었지만. 사실은 이전에도 쉬엄쉬엄 모임을 만들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첫 시작은 대학 때였다. 너무 오래되어 몇 학년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방학 때였다. 그 무렵 나는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심취해 있었는데, 어느 출판사(정음사?)에서 소설 전집이 출간되었다. 그걸 사고 싶어 안달을 하다가 어떻게 손에 넣게 된 것이다.
좋아서 전집을 사기는 했지만 혼자서 읽어내기는 만만치 않았다. 3단 편집된 두꺼운 장편 소설들의 양은 방대하고, 다루는 주제는 심각하고, 소설의 배경은 머나먼 러시아였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과 친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같이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갖자고. 누가 내 엉뚱한 제안에 넘어가서 동참했는지. 정확히 몇 명인지도 좀 흐릿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방학 동안에 그걸 독파했다는 것이다. 같이 하지 않았으면 도저히 해 낼 수 없는 분량이었다.
두어 달 내내 책에 파묻혀 보냈다. 내가 읽자고 제안했으니 흐지부지할 수도 없고. 종일 광활한 러시아를 헤매다가 어둑어둑해져서야 도서관 뜰을 벗어나곤 했는데, 그때의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책의 세계에서 현실로 나가는 문을 통과할 때 느끼는 약간의 현기증.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뒤로 고개를 돌리면, 불이 환하게 켜진 도서관이 보였다. 내가 잘 아는 익숙한 세계가 저곳에 있다는 안도감. 요즘도 독서 삼매경에서 현실로 돌아올 때 그 아득함이 문득 떠오른다. 아직 책을 놓지 못하고, 토론하는 서점을 만들겠다는 포부. 지금 내가 이런 욕심을 부리는 것도, 어쩌면 그 느낌을 오래,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확하게 어떤 방식으로 토론을 진행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돌아가면서 줄거리를 발표하고 인물의 성격에 대해 얘기를 나눈 것 같다. 누군가가 소설 속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러시아 역사책 읽기도 병행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19세기 러시아는 정말 복잡다단 그 자체였다. 온갖 층위의 신분제만으로도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완독 후의 뿌듯함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산맥 하나를 같이 넘은 기분이었다. 그 시절이 지나고, 우리들은 종종 말하곤 했다. 세상에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내가 백미로 꼽은 소설은 <백치>라는 작품이었는데, 작가의 탁월한 심리묘사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그리고 생긴 심각한 부작용 하나는 소설 쓰기를 그만두어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도저히 도스토예프스키를 능가할 수는 없다. 더 이상 다룰 주제도, 더 창조할 인물의 유형도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꿈이 얼마나 야멸찼는지. 그때 같이 읽기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한동안 막연한 꿈을 꾸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인생에는 가정법이 통하지 않으니 속단할 수는 없지만. 친구들 덕분에 숙제하듯 꼼꼼히 읽을 수 있었고, 토론을 통해 나는 너무 준비가 덜 되었다는 현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주부로 사는 동안, 구립 도서관에서 꽤 오랫동안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독서 회장을 몇 번 연임하기도 했다. 그때 가장 신경 쓴 것은 도서 선정이었다. 자꾸 고전이나 세계 명작으로 회귀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해 신간을 소개했다. 아이들이 동화책을 읽을 무렵에는 따로 ‘동화 읽는 어른들’이라는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동화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어린이 열람실은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무거운 그림책을 한 아름 빌려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했든지. 아이의 성장과 더불어 나도 고학년 동화의 세계에 입문했다. 이 기간에 내가 획득한 보물은 김성칠이 쓴 <역사 앞에서>와 로알드 달이라는 동화작가를 알게 된 것이다.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될 무렵 박물관에 나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좋은 책을 모으기는 했지만, 모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이전의 모임들은 이미 알고 있던 사람들이거나, 있던 모임에 내가 참여한 형태였다. 그렇다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 보따리를 풀 수는 없었다. 공공 도서관은 지역이 국한되어 있고, 개인의 주관적인 활동 공간도 아니고, 설사 기회를 얻는다 해도 어차피 한시적이지 않는가. 이번에는 오롯이 내가 선정한 책으로 사람을 모으고 싶었다. 그들과 시간이나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즐거운 수다를 떨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를 붙잡고 이 말을 할 것인가. 어디 광고를 낼 수도 없고. 책은 누구보다 속 깊은 친구라는 말 기억나는가? 친구를 잘 사귀면 또 좋은 친구를 소개받기도 한다는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