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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독서 클럽, 문을 열다.



좋아하는 책을 한 아름 들고 거리에 나선 기분을 아는가? 처음에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무거운 줄 모른다. 얼마나 매력적인 친구인지 신나게 얘기해야지. 내가 말을 꺼내기만 하면 사람들이 다 경청할 거야. 그런데 아무도 그게 뭐냐고 물어주지 않으면? 조금씩 자신감을 잃고, 점점 팔 힘이 빠지고, 그만 내려놓고 싶어 질 것이다. 이 소중한 것들을 아무 데나 내팽개칠 수도 없으니 주위를 두리번거릴 수밖에. 막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어준다면?


로얄 아카데미 대표가 그런 분이다. 갤러리에 그림 구경을 갔더니 지나가는 말로 내게 물었다. ‘뭘 하고 싶으세요?’ 그 무렵 나는 좀 의기소침 해 있었다. ‘독서모임을 하고 싶어요. 제가 선정한 책을 가지고’ 전혀 기대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나 못지않게 차분한 어조로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럼 저희 아카데미에서 한번 시작해 보실래요?’ 가끔 만나 같이 전시회를 기웃거리는 했지만, 이렇게 선뜻 내 짐을 받아줄지 몰랐다. 그 따뜻한 마음 평생 잊지 못할 거다. 한 번 실행해 본 적 없는 머릿속의 계획인데, 이런 신뢰를 받아도 되는 걸까.


<책과 담소하다>라는 강좌 안내문을 보내고 개강 날짜를 기다리는 동안, 그 조마조마했던 심정은 지금도 선명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신청자가 있느냐고 담당자에게 확인하고 싶었는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어쩌나? 혹시 한 명이라도 신청하면 얼마나 좋을까. 인원이 너무 적다고 폐강하자면 뭐라고 할까. 정말 생각이 많았다. 개강 며칠 전 드디어 전화가 왔다. 3명이 신청했다고, 그래도 강좌를 진행할 생각이냐고?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당연히 시작한다고.


드디어 기회를 얻었다는 기쁨도 잠시, 머릿속에 떠돌던 막연한 생각을, 구체적인 방법으로 바꾸는 과제가 생겼다. 가지치기를 하자니 어찌나 갈등이 심하든지. 개강일 아침까지 고심하다가 마음을 굳혔다. 욕심을 버리고 단순하게. 그래! 초심으로. 재미있게 읽고 말하는 모임. 지루하거나 부담스럽지만 않게. 사실 강좌의 주안점은 책을 정독하게 하는 것과, 저자의 글을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의견을 나누게 하자는 것이었지만. 그러려면 선정도서를 미리 읽어야 하고, 아직 얼굴도 모르니 숙제를 낼 수도 없고. 꿈을 펼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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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어떤 문구가 마음에 들어, 강좌를 신청한 것일까? 나는 독서모임 강사 경력도 없는데. 고마움과 궁금증을 가득 안고 첫 수강생을 만났다. 여자 둘, 남자 하나, 오도카니 강사를 쳐다본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누구나 대답하기 쉬운 질문을 던졌다. ‘내 인생 가장 인상적인 책은? 독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어렸을 적 우리 집의 독서 환경은? 독서 강좌에 신청한 이유는?’ 처음 본 사람들인데도 솔직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딱딱한 자기소개 대신 책으로 자신을 표현하니 자연스럽기도 하고. 나도 내 인생의 책 <책은 도끼다>를 꺼내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고, ‘지금 책을 읽는 목적이 있는지, 특별히 흥미로운 분야가 있으면 선정도서에 참고하겠다.’는 말로 강좌를 끝냈다.


기본적으로 독서를 꾸준히 하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와 책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다는 공통점을 가진. 그리고 로얄 갤러리라는 장소와 이미 진행 중인 아카데미 강좌가 신뢰를 주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어부지리로 기회를 얻은 셈이다.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무거운 책임감이 엄습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게 주문을 걸었다. 욕심부리지 말자, 즐겁게 토론할 수 있으면 된다. 첫 학기가 가기 전에 신입생이 두 명이나 늘어난 것이 그나마 고무적이었다. 한 가지 고충이 있다면, 갤러리에서 연 강좌라 다들 미술 분야에 관심이 많고, 수준도 만만치 않아 강사를 긴장시키기도 한다는 점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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