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그가 가진 물건으로 취향을 드러낸다. 무의식 중에 고른 것 같지만, 색과 모양과 기능에 자신 만의 선택 기준이 있다. 비슷한 종류의 물건을 여러 개 갖고 있거나, 어딜 가든 자신도 모르게 멈춰서, 진열장 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자신의 관심 분야이다. 이걸 꾸준히 모으면 수집이라 하고. 이렇게 한 분야에 집중한 사람을 전문가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주위의 모든 물건을 독특한 선별과정을 거친 것만으로 치장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을 안목이 높다고 한다.
<수집 미학>은 미술평론가 박영택의 심미안을 드러낸 책이다. 소소한 물건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 책은 굉장히 많다. 사실 누구나 한 권쯤 뚝딱 쓸 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좋은 책 고르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 잡다한 추억 나열이나 물건 자랑에 빠지기 쉬우니. 이 책은 물건과의 인연은 물론이고, 자신의 미적 관점과 철학을 조근조근 말한다. 때로 조금 쑥스러워하면서. 왜 그 물건에 애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떤 경로로 소장하게 되었는지. 그 물건이 삶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
일상, 문구, 흔적, 취향, 기억의 장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각장에는 소소한 물건이 등장한다. 작은 것들을 통해 발견하는 지혜의 구절들. 귀이개를 보고 고요를 채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다니. 누가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을까? 그의 까칠한 시선을 따라가다 문득 드는 생각 하나. 멀쩡한 직업을 가진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남자가 장난감 같은 물건을 놓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니. 조금 병적이거나 변태 같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다.
하루 동안의 소음과 하루치의
말의 무게가 수북이 쌓여서일까?
-누가 내 얘기를 하나 왜 귀가 가렵지? 가끔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 귀를 후빈다.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찌꺼기들이 귀속에 쌓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귀는 한번 후비기 시작하면 더 가렵다. 다른 때는 잊고 있다가도 한번 손을 대면 멈출 수가 없다. 왜 일까?
복 받겠다는 열망이자 눈물겨운 희구이다.
-박물관에서 일할 무렵 유물에 쓰인 多福이나 多男, 長壽자를 보면 어쩐지 슬펐다. 풀어쓰면 ‘복 많은 남자로 오래 사는 것’ 아닌가. 우리 조상들이 바라는 것이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단순하니 욕심 없는 삶이라고 위안을 삼아야 할까. 여자들은? 아들이나 많이 낳으라고? 그나마 시대를 잘 타고났으니 말이지, 조금 우울해진다.
나는 항상 누군가를 만나 악수를 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면 그 손을 주의 깊게 보는 편이다. 나도 그런 깨끗한 손을 갖고 싶은 것이다.
-이 구절을 보면서 ‘손을 더럽힌다는’는 구절이 떠오른다. 단순히 청결의 의미로만 썼을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보았다. 어쩌면 나 혼자 지레 겁먹고 그 구절을 확대 해석했는지도 모른다.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나도 깨끗한 손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손에도 표정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을 볼 때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까? 말투, 그 사람이 쓰는 언어, 옷차림(특히 색채의 조화)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편이다.
책상 서랍에 들어있다가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와서 내 신체에 관여하는 이 도구, 연장은 비교적 먼 여행길을 떠날 때면 반드시 챙겨가는 우선적인 것이기도 하다.
-나의 신체 부위 중 가장 큰 축복은 눈이었다. 언제나 모든 것이 너무 선명해서 때로 모른 척해버리고 싶은 사람을 대면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쉰을 넘으면서 이젠 노안으로 불편을 겪고 있다. 어릴 적 어른들은 왜 모두 시커먼 선글라스를 쓰나 의문이었는데. 요즘은 나도 밖에 나가기가 무섭게 차단막을 걸친다. 눈부시기도 하고, 주름살을 감추고 싶은 욕망도 있다. 나의 첫 선글라스는? 하와이 살 때 출근한 지 며칠 만에 일 못한다고 잘린 적이 있었다. 세상에 내가 이리 쓸모없는 사람인가에 대한 자책으로 버스 속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처음 산 선글라스를 끼고. 완벽하게 표정을 차단해 주는 기능에 안도하면서. 그 이후부터 애용하게 되었다. 꼭 내 것이 아니어도 안경에 대해 모두 얼마간의 추억을 가지고 있지 않나?
그저 공연히 둘러본다, 그러면서 내가 고른 이 아름다운 테를 넘어서는 것이 없음에 적이 안도하기까지 한다.
-이런 때가 가끔 찾아온다. 같은 물건이 다시 나오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한 개쯤 더 사놓아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때가 지나고 나면 새 것들이 내 눈을 현혹시켜 금방 잊기도 하지만. 지난해 동대문시장에서 고른 바바리는 좀 고민 중이다. 다들 어디서 샀냐고, 명품인 줄 알았다고, 하는 말에 살짝 흔들린다. 나는 속물이다.
평론인인 내가 하는 일은 결국 손이 하는 일이다. 나란 존재는 그래서 손이 전적으로 대변할 수 있다. 물론 얼굴도 그렇지만 얼굴은 하나의 이미지를 안기는 반면 손은 내 몸과 몸 밖의 세계를 연결하고 세계와 접속되게 하는 핵심적인 기관이다. 손은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 연장된 몸으로 삶의 최전선에서 세계와 맞서고 있다. 손으로 써 내려가는 글은 나란 존재를 인식시키는 일이자. 나를 주체로 만드는 일이다.
-손톱깎이 세트에서도 언급했듯이 손의 이미지에 많이 치중한다. 글을 손이 쓰기는 하지만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예술 분야가 손의 기능을 필요로 한다. 나는 글은 손이 아니라 머리가 쓴다고 정리하고 있었다. 하긴 아무리 근사한 생각을 갖고 있어도 손으로 풀어내지 않으면 그 완성을 보지는 못한다. 책을 읽고 정리해야 한다고 수없이 주장하지만 나 스스로도 실천까지는 어렵다. 토론을 해야 하는 텍스트만 할 수 없이 정리의 시간을 거치니. 손이 내 존재를 대변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내게도 일리가 있다.
내 손의 궤적이 내 직업과 삶의 방식을 말해주고 있지 않을까?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손으로 무슨 일을 할까. 여자와 남자의 분별도 손으로 하는 행위에서 나눠진다. 과일을 깎는 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리모컨을 조정하는 손. 화장품을 두드리는 손도 욕망을 잔뜩 담고 있다. 청소, 빨래, 운전, 책에 줄을 긋는 일까지 참 무수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손놀림은 따뜻한 찻잔을 쥐고 책장을 넘기는 동작이 아닐까.
나는 정말 많이 녹아야 한다. 나는 너무 경직되고 건조하고 마냥 삭막하다. 핸드크림이 나를 반성하게 한다.
-모두 얼마간은 자신이 너무 딱딱하거나 차갑다고 생각한다. 철이 든다는 것은 순수를 잃어버리는 행위와 직결되고, 그 자리에 독립적이고 고독한 인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린 시절과의 결별은 몽롱한 꿈의 완충지대를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약간의 얼룩이 묻고 지저분해졌지만 그렇게 시간의 흔적이 깃든 천은 여전히 나름의 기품을 간직하며 소멸해 가는 데서 연유하는 매력을 보여준다.
-이 장을 읽으면서 엄마가 해준 무명 두루마기가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엄마가 실을 잣고, 직접 만들어준 남편의 두루마기인데, 왜 아름다운 가게에다 기부해 버린 것일까? 그때는 너무 많은 옷을 끌어안고 있다는데, 일종의 피로감이 있었다.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데 골몰해서 망설임 없이 작품을 버린 것이다. 혹시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서운해하실까? 내내 가슴이 아려온다. 그런 천은 다시 구하기도 만들기도 어려운 것인데. 입지 못하더라도 조각이라도 간직할 것을.
일상의 도구적 관계에 저당 잡힌 사물을 자유롭게 풀어내서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 예술 행위이다. 그렇게 해서 비로소 의미 있는 사물이 다시 태어난다. 내게 이작은 돋보기는 실용적인 물건이자 장난감이며, 유희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예술론을 작은 사물에 빗대어 풀어놓다니, 부담 없는 접근이 아닐지, 이런 저자의 태도가 책을 선정하게 했다.
자신이 애착을 가지는 물건들에 대해 얘기를 풀어보는 건 어떨까. 나는 사과에 관심이 많다. 먹기도 즐기고, 몇 점의 소품도 갖고 있다. 여행지에서도 제일 먼저 그 나라의 사과를 맛본다. 기념품도 있고, 선물을 받기도 했다. 지인들은 사과를 보면 내가 떠오른다고도 하니, 광고는 하고 볼일. 언제 사과를 소재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표현해볼까 생각했는데, 몇 년 전 누군가 쓴 책을 보았다. 좀 김이 새긴 하지만, 접근 방법만 바꾸면 되지 않을까. 세상에는 참 많은 종류의 사과가 있다.
우리나라 미술평론가의 글은 대체로 난해하다. 미술관에서 받은 해설서나 큐레이터의 소개 글도 무슨 뜻인지. 그러지 않아도 어려운 현대 미술의 경우 살짝 짜증이 난다. 글은 거의 외국어로 된 전문용어 투성이. 자신도 정확히 모르고 대강 번역한 것은 아닐까? 쓰고 한번 읽어보기나 한 것일까? 따져보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박영택의 글은 잘 읽힌다. 좀 현학적이긴 하지만 깊이가 있고. 이번 책은 꽤 감성적인 일면을 보여 쉽고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예의 주시하는 저자 중 한 명. <예술가의 작업실>, <얼굴이 말하다>, <하루>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