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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남 서촌 그 책방 Oct 23. 2016

 세상 물정의 사회학

세상이 정말 답답하다. 이게 사람 사는 곳이 정녕 맞나?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든다. 캄캄한 동굴에 갇히지 않고는 이리 암담할 수가 있을까? 사방을 둘러보아도 빛이 보이지 않는다. 화를 내다가, 눈을 감다가, 욕을 하다가, 귀를 막다가, 모르는 척하자고 다짐하다가, 우리가 등신인 줄 아느냐고 고함을 지르다가. 누군가는 이런 때일수록 뻔뻔스러울 정도로 떳떳하게 버티라고 하는데. 출구도 빛도 없는 곳에서 버티기가 능사일까.   

   

만약 사회학이 어떤 한 개인의 삶도 설명할 수 없다면, 혹은 그 연구 대상이 사회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으로부터 완벽하게 유리되어 있다면, 사회학은 학자라는 전문가 집단의 호사스러운 말잔치가 만들어 낸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노명우의 책은 ‘신기루’를 만들지 않겠다는 서문으로 시작한다.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말은 ‘내가 곧 국가란다.’는 말이란다. 그렇다. 내가 없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이 세상이 아니던가. 내가 곧 국가이고, 세상이고, 우주, 그 자체인 것이다. 모든 것의 최상위에 현재의 내가 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시공간이 현재의 한국인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세상을 파악해야 하는 임무가 있지 않을까? 전제주의 국가도 아닌데 우리의 폐하에게 이대로 세상을 맡겨 두고, TV 만 보고 있거나, 기도만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학자들은 연구실에 유리되어 말장난을 하는 경우가 많고, 우리는 생활에 너무 밀착되어, 눈앞의 이익을 좇다가 종종 길을 잃기도 한다. 객관적인 상황판단이 필요하다. 책은 제1부 세속이라는 리얼리티, 제 2부 삶의 평범성에 대하여, 제 3부 좋은 삶을 위한 공격과 방어의 기술, 로 구성되어있다. 미리 말해두지만 이 책은 ‘어떤 기술’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프롤로그의 제목이 ‘처세술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단어를 위하여’ 이니까.  


각 계급의 구성원들은 자신들보다 한 단계 높은 계급에서 유행하는 생활양식을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생활양식으로 인정하고 이러한 이상을 추구하는데 자신들의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명품이나 프랜차이즈 식품에 대한 우리의 속물적인 근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건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자본주의의 속성이긴 하지만. 남루한 캄보디아 거리에서 한국 배우의 화장품 광고를 보고 나는 우습기도 슬프기도 했다. 서양 여자 일색인 우리의 버스 정류장 광고판을 본 백인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새파랗게 젊은 아이들이 꿈도 이상도 없이 명품에만 열광하는 현실이라든지, 돈 없는 중년은 짝퉁으로 치장하고 있으니. 연예인은 얼굴로 상류층 반열에 오르고. 그들에게 지름길을 놓아준 성형외과만 번성하는 사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선진국이라는 유령을 따라나서는 해외여행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선진국에 가서는 주눅 들어서 얌전히 사진만 찍고, 후진국에 가서는 돈지랄을 떨고 있다고. 대학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았다. 영어 논문만 우대하는 사태라든지. 외국학자는 한국에만 오면 석학 대접을 받으니. 골수에 박힌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다. 조선시대까지 한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언제까지 머리를 조아릴 것인지? 외국 학자가 자기 나라 연구만 해도 바쁜데, 잠시 온 한국에 대해 얼마나 알겠는가. 우리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왜 그들에게서 답을 얻으려 하는지.   

  


위정자들은 언론을 이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려 하고, 오피니언 리더들은 그들을 등에 업고 출세에 목을 매는 것이다. 독재자들이 스포츠를 활용해서 자신들의 약점을 은폐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건 이미 비밀도 아니다. 정신을 엉뚱한 곳에 집중하게 하고 골똘한 생각을 방해하는 것이 전형적인 수법인 것이다. 그러는 사이 역사를 자신의 구미에 맞도록 왜곡할 수 있기에. 국정화 교과서 반대 시위가 격렬한데도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할 교육부마저 정치가의 들러리를 서고 있으니, 슬프기만 하다. 또한 위험이 곳곳에 산재해 있지만 위정자들은 공익광고를 통해 안전하다고 세뇌시킨다.     


좋은 삶에 기대하는 유토피아적 희망은 삶의 무시무시한 리얼리티와 마주 할 수 있는 용기를 먹고 자란다. 세상은 아름다운만큼 추하고, 사람들은 선한 만큼이나 악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도 있지만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있다. 사회학은 힐링이라는 값싼 동정과도, 신세한탄이라는 투덜거림과도, 좋은 삶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시니컬한 태도와 다르다. 세속이라는 리얼리티와의 용감한 대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숨기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이웃도 종교도 학벌도 이익집단일 뿐이란다. 경제적 안정감을 획득하기 위한 손쉬운 멤버십이 학벌이고 종교이다. 그래서 결혼마저 비슷한 조건을 갖춘 사람과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끼리 굳건한 동맹을 맺듯 이루어진다. 금수저 집단은 그렇게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고, 그 사다리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오늘도 자기계발서를 읽는다. 그러나 책은 단지 심리적인 위안을 선물할 뿐 계급의 법칙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니.     


인간이 그릇된 행동을 했을 때 느끼는 최소한의 양심이 수치심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것마저 돈이 대신하고 있음을 슬퍼한다. 이렇게 돈으로 부끄러움을 처리하였으니. 공금횡령이나 불법 상속, 논문 표절, 위장전입 같은 어마어마한 독버섯이 자리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런 편법을 저지른 사람은 이미 둔감해져서 오히려 수치심을 모르고 있다. 검찰에 소환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면 죄의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고, 하나같이 영혼 없는 소감,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단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세상에서 느끼는 고통에 당신은 책임이 없다.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은 채 당신 마음속의 고통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어떤 존재가 있다. 그 어떤 존재를 ‘콜드 팩트’라 부른다. ‘콜드 팩트’를 찾아낼 때 우리는 비로소 힐링의 대상은 나의 마음이 아니라 각자가 살고 있는 사회임을 깨닫는다. ‘세상 물정의 사회학’은 죄가 없는 개인들이 죄가 많은 사회에게 불만을 말하는 애처로운 시도이다.   

  


거대한 벨트에 끼지 않기 위해 우리는 냉정한 진실을 알아야 한다. 적어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지는 않아야 하니까.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이런 시도를 한 학자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그러나 이 책도 2013년에 쓰였으니, 그간 우리 사회는 또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발전을 거듭했는지. 이 속도로 가면 한 해 한 권씩 써도 될 만큼 무궁무진할 소재가 있지 않을까.  

   

불편한 진실은 굳이 보여야 할까. 나날이 보는 충격적인 뉴스만으로도 답답할 텐데. 책을 선정하면서 정말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미리 연막을 좀 쳤다. 다소 무거운 주제여서 다 읽지 않아도 된다고. 영 부담스러우면 끌리는 소재만 읽으라고. 그러나 찬찬히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라고. 우리가 사는 한국의 실정이니 모르는 것은 없을 거라고. 거울을 보지 않으면 내 민낯을 볼 수 없으리니.     


토론은 다소 무거웠으나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무턱대고 핏대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전문가가 짚어주는 진단을 받으니, 속 시원한 일면이 있었단다. 책 한 권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으나, 책 한 권도 안 읽는 사람보다는, 읽은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은 좀 트지 않을까? 그 작은 용기가 모이기를, 그래서 조금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책에 소개된 전인권이 쓴 <남자의 탄생>과 노명우가 쓴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도 흥미로웠다. <남자>는 여자들이 <혼자>는 기혼자들이 읽고 토론하면 불꽃이 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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