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의 변화
첫 고과 평가가 C가 나왔다.
나름 정말 열심히 일했고 모두 너만큼 일 잘하는 사원 1년 차가 없다고 해서 내심 기대했는데, 결국 승진을 앞둔 선배 사원에게 밀린 상대평가의 결과는 C였다.
내가 결과를 열람하기도 전, 과장님은 팀장님에게 먼저 얘기를 들었는지 나를 따로 불러 너 잘한 거 내가 다 안다, 다만 회사 생활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중에 잘 받으면 다 상쇄된다, 나도 1년 차 땐 그랬다는 말을 했다. 사실 그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다음 날 팀장님이 나를 따로 불러내서 면담을 할 때 촌스럽게도 꺽 꺽 울었다. 머쓱하게 미안하다고 회사생활 길게 보자고 하는데 이상하게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올해 결국 C 정도로 일했나 자책하게 돼서. 그리고 억울해서. 이후 팀장이 하는 말의 요지도 결국 네 성격상 넌 자책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절대 그런 게 아니다. 평가자가 이런 말 하는 것만큼 책임감 없는 게 없지만.. 하고 말을 흐렸다. 사실 많은 말을 해줬는데, 나는 쪽팔리게 계속 눈물이 나오는 걸 참느라 팀장님의 슬리퍼만 보고 있었다.
일도 손에 익고 회사에 나름 적응하고 있지만 연말이라 그런지 부쩍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일을 왜 하는지. 열심히 또 잘하고 싶은데 그건 내 성격 탓인 건지, 여기가 아니어도 되는 건 아닐지. 넌 정말 일을 열심히 해, 왜 이렇게 착해-라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고 호구처럼 보인단 말로 꼬아 듣게 되는 건 왜인지. 일을 잘한다고 인정받아 뿌듯한데, 계속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느낌은 어디서 왜 드는 건지. 나에게 동기부여를 주는 것은 무엇인지.
날 이렇게 만든 회사를 욕하다가도 결국 가장 한심스러운 것은 나였다. 예전의 나는 알고 싶은 게 많았고 항상 세상으로부터 자극받아 반짝반짝했는데.
‘더는 이런 식으로는 안돼’라고 다짐하지만 반복되는 '그런 식'의 나날들. 그리고 여러모로 드는 수많은 생각들. 다른 미래, 더 나은 삶에 대한 궁금증, 학생을 지나 직장인이라는 위치에서 새로이 겪는 복잡다단한 고민들. 어른은 뭘까? 나도 그게 될 수 있을까? 2017년을 앞두고 나는 늦은 사춘기를 겪고 있는 걸까. 지금까진 미래를 점쳐보지 않고 현재만 사는 삶이 나쁘진 않았는데, 유독 누구라도 붙잡고 내 미래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나날이다.
‘더는 이런 식으로는 안돼’라고 다짐하지만 반복되는 '그런 식'의 나날들
회사의 장점을 굳이 하나 뽑자면, 다니지 않았으면 몰랐을 인간 군상을 많이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나랑 안 맞는 유형이라고 여겼던 사람에게 의외의 모습을 발견해 친해지기도 하고, 모든 걸 다 안다고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전혀 다른 면모를 보기도 한다. 엄청나게 가깝지도 엄청나게 멀지도 않은, 적당한 울타리 내에서 변화무쌍한 관계의 다이내믹스를 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나는 그 특별한 경험을 여유 있게 관조하는 작가적 성격은 못된다. 언제든 그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감정이 폭발하기에, 감정의 동요가 크기에, 그렇기에 나는 내가 회사 부적격자라고 느껴진다. 일을 못해서가 아니라, 윗사람이 괴롭혀서가 아니라, 항상 핑계처럼 말하고 다니는 “조직문화” 때문이 아니라, 감정이입이 빠르고 사건과 사람들의 파도에 철썩철썩 처맞아 쉽게 깎이는 절벽 같은 나야말로 회사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천상 직장인은 회사 일에 감정이입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르게 보면 이런 유형은 파도에 빠르게 깎이고 깎여, 결국은 회사가 그렇게 바라는 반들반들한 바위에 누구보다 빨리 다다른다. 나는 그게 무섭다. 결국 이렇게 적응하다 회사가 그렇게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되어버릴까 봐. 그리고 그 박수 뒤의 부담감과 책임감에 목이 졸려버릴까 봐.
우울한 하루를 보낸 어느 날에.
약 1년 전, 회사 일로 엄청 우울했던 적이 있었고 그때 들었던 조언은 ‘회사일에 감정 이입하지 마. 너만 힘들어’였다. 지난주 금요일 불합리한 방식으로 회사로부터 나의 시간을 망쳤을 때 들었던 소리 역시 ‘회사 일에 감정 이입하지 마. 너만 힘들어’였다. 1년 전의 나는 감정 이입이 빠르고 인내심 있게 넘어가지 못하는 나를 자책했는데.
지금 드는 생각은 ‘나는 그냥 이렇게 살래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곳에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조직에서라면 제가 더 빛날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이곳에서 숨죽이며 살기에는 너무 아까워요.
그리고 퇴사했습니다
*상단 그림은 툴루즈 로트렉의 'la pelirroja con blusa blanca'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