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과집 Apr 15. 2019

왜 요즘 것들이 퇴사하냐구요?

임원과의 퇴사 면담


마지막 근무 일자까지 정해진 요즘, 당연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개중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은 팀 다과 캐비닛의 과자 라인업 다양화다. 이번엔 녹차 브라우니를 사서 팀장님에게 하나 드렸다.


“새로 산 녹차 브라우닙니다”
“녹차 브라우니가 있어?”
“예”
“브라우니 뜻이 초콜릿으로 만든 디저트란 뜻 아닌가.. 녹차 맛 나는 초록색 브라우니는 브라우니가 아닌 거 아니야?(글적)”
“팀장님 지금 브라우니의 본질에 대해 논하시는 건가요?”


브라우니의 본질에 대해 논하는 퇴사 전 무료한 나날들. 대부분의 시간엔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 퇴사를 고백하고 많은 조언을 듣는다. 건너 들어서 섭섭해하지 않도록... 나 나름대로는 회사와 괜찮게 이별하는 중이다. 회사를 나가게 되는 마당에야 듣게 되는 각자 인생에 대한 고민들도 소중하고 재밌고.


물론 격변하는 나의 감정 상태를 보는 것이 가장 재미있다. 취업 컨설팅의 신인 대리님에게 퇴사 이후 커리어 쌓는 법과 해외 취업에 대한 강의를 들은 날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이 과다 초과하여 엄마한테 징징거리기도 했고 (“엄마 회사 괜히 그만둔다고 했나 봐…”), 약 세 번의 퇴사를 거치신 내가 사랑하는 차장님이 나의 도전에 대해 격려해주던 날엔 갑자기 낙관이 치솟아 두둥실 구름 위를 날아다녔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지금은 상관없어 보여도 나중에는 다 이어질 거야”) 약 3주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술자리가 있다는 게 문제긴 한데. 나갈 때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회사 인싸가 되다니.






매년 주니어 퇴사율은 최대치 경신 중이다. 이번 상반기에 사업부 안에서만 6명의 사원/대리가 나갔다. 직무를 살려 동종 업계로 이직한 친구들은 아예 없고, 다신 이곳에 발도 안 딛겠다는 듯이 스타트업, 외국계, 사업, 대학원, 장기 여행 등 각기 다른 행보를 선택했다.


입사 후 회사일이 손에 익을 때 즈음엔 누구나 이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한다. 그때의 고민이 퇴사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회사는 개인에게 미래의 커리어 패스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해야 한다. 커리어도, 조직문화에 대해서도 더 이상 이곳이 궁금하지 않으면 나갈 수밖에 없다.


퇴사하겠다고 처음 실장님에게 말한 날, 실장님은 실에 바라는 점을 다 당신께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쓰게 된 “00실에 바라는 점”라는 제목의 메일은 쓰다 보니 족히 4페이지가 넘었다. 조직문화 개선에 대하여, 업무 개선에 대하여, 회사에서 동기를 상실할 때, 남성적인 조직문화에 대하여, 요즘 우리 실 사원들의 고민 등… 등 부제까지 적어가며 구구절절 나의 생각과 대안들을 적어 보냈다. 메일을 보내고 아무 회신도 받지 못하다가, 3일 후 다시 실장님은 내게 면담을 요청했다. 내가 보낸 메일을 인쇄해서 형광펜으로 밑줄까지 그어가며 몇 번이나 읽으셨다고. 정말 실장님이 가져온 내 메일은 노랗게 그어진 형광펜 밑줄과 본인의 메모로 가득했다.


면담은 메일의 연장이었다. 주로 내가 제시한 문제와 대안들을 구체화하는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우리 실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어차피 나가는 사람이었기에 최대한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다. 실제 고통받고 있는 동료들은 하지 못하는 말들 말이다. 실장님은 내게 물었다. “면담한다고 해서 진짜 솔직하 게 얘기 안 하지?”


“네. 안 하죠. 말해도 안 바뀔 거 같고, 괜히 말했다가 내가 한 말이 불씨라도 튀게 될까 봐 무섭고, 남들은 괜찮은데 나만 부적응자로 찍힐 수 있으니까 걱정되기도 하고요. 보통 말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실장님, 사원 대리들과 면담은 자주 하셔야 합니다. 그들 이야기를 많이 들으셔야 해요. 말할 기회가 상시적으로 있는 거랑, 마음먹고 어렵게 말하는 거랑 다르니까요. 또 팀장이 아니라 실장한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어요. 만약 내가 팀장 때문에 가장 고통받고 있다면, 그건 팀장이 아닌 실장님께 얘기해야 하는 사안이겠죠. 말할 수 있는 채널이 다양해야 하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말하지 않더라도 말할 기회를 제공해야 하고, 보지 않더라도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 사업부가 바뀌지 않더라도 실은 바뀌어야 하고, 팀이 바뀌지 않더라도 워킹그룹은 바꿀 수 있다. 그런 작은 시도가 조직 문화를 바꾼다고 믿는다. 그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바로 바뀌지 않더라도 바뀔 때까지 시도해야 하는 것 말이다.


실장님은 내가 가져간 볼펜까지 빌려서 대화 중간에도 메모를 했다. 나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고맙기도 했지만, 아쉽기도 했다. 언제나 나는 회사가 싫다는 것 이상의 대화를 하고 싶었다. 회사 족 같은 거 다 알고, 윗사람 안 바뀌는 것도 다 알아. 그래서 지금 뭘 해야 하는데? 이걸 얘기하지 않으면 바뀌는 게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갈 때야 이런 얘기를 원 없이 할 수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했다.



나는 더 이상 회사에서의 내 미래가 궁금하지 않기에 나간다.

하지만 아직 이곳에서의 미래가 궁금한 다른 이들에게,

이 회사가 더 좋은 곳이 되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다음 화는 실장님에게 보낸 메일 전문을... 가져오겠습니다.. 후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