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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Apr 22. 2019

퇴사하는 사원이 임원에게 보낸 메일

"안녕하세요, 000 사원입니다"

이 글은 지난주 위클리 매거진에 올린 "왜 요즘 것들이 퇴사하냐고요?"와 이어지는 글임을 밝힙니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000 사원입니다.


지난주 면담 때 말씀 주셨던, 우리 실에 바라는 점에 대해 일주일간 고민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보내드립니다.


대안 없는 고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주변 사원들과 많이 이야기하고 고민을 나눈 사람으로서 솔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을 것 같아 가감 없이 적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아무쪼록 0000실을 이끄는 실장님의 고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의견이 있었으면 합니다.




조직문화 개선에 대하여


조직 문화가 좋다/나쁘다는 보통 상대적으로 평가하게 됩니다. 저희 실의 조직문화는 사업부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매우 좋다고 생각합니다. 상사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휴가 사용이 자유롭고, 강제적인 회식이 없고, 출퇴근 시간도 유연해졌으니까요. 겉으로 측정할 수 있는 조직문화는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조직문화가 좋냐고 물어온다면... 그리고 조직문화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물어온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 나은 조직문화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끔 본부 차원에서 IT회사의 조직문화를 벤치마킹하러 가기도 하지만, 그곳의 조직문화를 제조업 기반의 대기업인 우리 회사에 바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15년도에 000에서 인턴을 하던 때, 그곳엔 이미 유연 근로제가 시행되고 있었고, 회식 문화가 없었으며, 스마트 보고가 한참 전에 자리 잡았지만 그건 그곳이 보다 작은 규모의 IT 회사였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겐 우리 회사에 적용할 수 있는 더 나은 조직문화에 대한 상상력이 없습니다. 본부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조직문화 개선 활동에 대한 리더의 지원은 당연히 더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하겠으나, 직원 개개인, 특히 조직문화 관련 업무를 하고 있는 저희 실원들에게는 더 나은 조직문화가 무엇인지 자극할 수 있는 경험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다른 교육 참여가 될 수도, 세미나나 사외교육, 콘퍼런스 참석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사소한 자극이 업무나 인식의 틈을 벌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주니어들이 새로운 경험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선 정보의 양이 제한되어 있고, 정보를 알아도 당장의 업무에 치여 쉽게 자리를 비울 생각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원들에게 자극을 받을 기회가 다양하게 제공하고,

실제로 참여할 수 있도록 팀에서 서로 업무적 공백을 메꿀 수 있게 된다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업무 개선에 대하여


업무를 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같은 실, 팀 안에서도 서로의 업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특히 현재 저희 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TFT의 경우, 전사적인 공감대를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불과 제가 00에 있을 때만 해도, TFT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실의 업무에 대해 관심 갖지 않은 저의 불찰도 큽니다. 다만 워크숍이나 정기적으로 자리를 통해 공유되는 내용 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TFT는 물론, 각 팀의 업무가 잘 공유되어야 시너지가 나오고 각자 본인 업무로의 확장성을 고려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공수를 들여 내용을 정리하거나 추가적인 정기적인 회의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속 가능한 소통과 공유는 러닝 세션/집합 강의를 한번 추가하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가진 툴과 플랫폼을 활용해서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의 마련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업무 공유 시, 참조에 수신처가 추가되는 것으로도 상호 업무 이해도가 높아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시적이고 자발적인 공유가 어려운 것은.. 정보 공유에 대한 부담감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정보는 공유될 때 더 가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정보가 자유롭게 공유되고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을지, 실의 중요한 업무나 교육, 안건에 대해 공개적으로 공유가 가능할지.. 방법을 지속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동기가 떨어지는 순간


회사에서의 무력감은 차별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일이 힘들다’라는 생각이 들 때보다, ’ 나만 일이 많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힘들다'라는 생각이 들 때 의욕을 쉽게 상실합니다. 팀원이 힘들어하고 있다면, 일을 바꾸기 전에 팀원 간 격차를 줄여주는 것이 우선일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실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부 안팎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연구소의 직원들보다 내가 일을 더 많이 한다고 느낄 때, 옆의 팀보다 더 힘들다고 느낄 때, 저 워킹그룹보다 더 관심받지 못하다고 느낄 때...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느끼고, 조직에 대한 불만과 상대에 대한 불만이 생깁니다.


가끔 상향평준화가 아니라 하향평준화가 되고 있다고 느끼는 건 이 순간입니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사업부 변화의 속도에 우리 실이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다른 곳은 더 힘들어.. 어딜 가나 그래.. 내지는 나 때는 더 심했어라는 말이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곳이 힘들다고 해서 내가 안 힘든 것은 아닐 테니까요.)


안으로는 업무의 격차를 줄이고 성장에 필요한 업무를 하면서, 조직 전체적으로도 균형적인 동기부여와 보상이 제공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성적인 문화에 관하여


빠른 속도로 조직 문화가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도 우리 회사는 여성으로서 커리어를 쌓기 어려운 점이 많은 조직인 것 같습니다. 300명이 넘는 임원들 속에서 여성 임원이 3명이라거나, 이 중 공채 출신이 1명이라거나, 그마저도 술자리 접대를 강요해 사표를 제출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원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 좋은 여성 리더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커리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친정’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제 주변엔 닮고 싶은, 여성 리더와 롤모델이 참 많기 때문에 언제나 큰 용기를 얻습니다. 그러나 이런 리더들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성차별적 문화를 바꿔나가는 모두의 노력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해온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결혼과 육아를 병행하며 일을 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여성 직원들에게 결혼이나 육아가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퇴사나 승진 누락을 걱정하지 않고 남자들도 자유롭게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날도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외모에 대한 불필요한 언급도 지양하는 문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원들의 고민


실의 두 팀에서 일을 하며, 저를 포함한 사원들이 했던 고민들을 두서없이 적어보았습니다.


“워킹그룹장 없이 일을 하면 업무적으로 의지할 사람이 없다는 것도 힘들지만, 내가 하는 일이 맞는지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힘들다. 더 나아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거리적인 이유로 보고하는 것이 쉽지 않다. 적어도 실 내에서만큼이라도 자유로운 스마트 보고가 이뤄지면 좋겠다”
“팀 내 워킹그룹의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혼자 일한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년에 어디서 일하게 될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사수가 없어서 느끼는 어려움입니다. 저는 운이 좋게 좋은 사수님들과 계속 일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중간관리자가 없을 때 업무와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워라밸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은 사원으로서 당연한 고민인 것 같습니다. 


제가 주니어로써 바라는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 삶과 일상을 통제할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넓은 가능성 안에서 진로를 그리는 것입니다. 생활적으로는 예상 가능한 일상을 살 수 있어야 하며 (Work&Life Balance) 커리어상으로는 회사 안에서 다양한 진로의 가능성을 꿈꾸고 그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Career Path)





마지막으로..

회사 안에서 저 자신을 정의하자면 

뒤늦게 직무에 대해 고민을 한 실패 사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입사하고 나서야 직무와 업에 대해 

늦게 고민하고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지만, 

우리 실 안에는 이 안에서 경력을 쌓고 싶고 

그럴 능력도 있는 친구들이 정말 많습니다.


저는 다른 곳에 대한 궁금함이 크지만, 

지금의 직무를 계속하고 싶은 친구들에게 

회사가 그 궁금함을 앞으로도 키워줄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서없이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000 드림





* 상단 이미지는 Gerhard Richter의 <Gilbert & George(1975)>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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