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정신승리법
여행을 하다 보면 이른바 ‘공치는 날’이 있다. 모든 날이 쾌청하고 모든 관광지가 오픈이면 좋겠지만, 아무리 준비를 해도 운이 나쁜 날이 있기 마련이다.
나에겐 두 달 전 포르투갈 브라가 Braga를 방문한 날이 그랬다. 그 날은 포르투갈의 건축가 에두아르도 소토 드 모라 Eduardo Souto de Moura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준 '브라가 축구 스타디움'을 보러 가는 날이었다. 비록 나는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고 호날두가 포르투갈 사람인 것도 몰랐지만, 깎은 듯한 암석 위에 그대로 경기장을 얹은듯한 소도토 드 모라의 축구장은 건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보러 가야 하는 곳이었다. 사전 검색을 통해 경기를 하지 않는 날에도 내부 관람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찾았다. 당일에는 흐린 기상예보를 보고 가지 않는 것을 고민했으나, 포르투갈에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아 가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포르투 상 벤투 역으로 기차를 타러 갔다. 브라가는 포르투에서 북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그렇게 도착한 브라가는...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기차역의 입구에는 우산이 없어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나에게는 우산이 있긴 했지만, 양산 수준의 3단 우산이었다. 허술한 우산을 쓰고 브라가 시내로 향했다. 바람이 계속 불고, 운동화는 물이 들어가 찔꺽거렸다. 브라가 시내에서 축구장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구글 맵에 뜨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우버나 그랩 차량도 없어 어떻게 가야 할지 헤매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한 정류소에서 운 좋게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이십 분 정도 지나고 버스에서 내렸다. 내린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2차선 도로에 버려진 느낌이었다. 뭔가 축구장으로 보이는 표시가 있긴 한데, 문이 닫혀있으니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라는 표시뿐이었다. 나는 다른 쪽 입구로 가기 위해 다시 구글맵을 켜고 약 30분을 걸었다. 대부분 오르막길이라 올라가면서 몇 번씩 욕을 했던 것 같다. 날씨는 우중충하고, 비는 내리고, 주변엔 아무도 없고, 무섭고, 왠지 포르투갈 사람들이 집 안에서 창문을 통해 힘들게 언덕을 오르는 아시안 여성을 보며 혀를 찰 것 같다는 자의식이 발동하고.. “쟤는 이 날씨에 어디를 가는 거지...”
먼 길을 돌아 도착한 축구장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렇게 황폐한 광경은 또 처음이었다. 이거 하나 보려고 브라가의 궂은 날씨를 뚫고 왔는데 결국 아무것도 볼 수 없다니. 사실 정상적으로 사고 회로가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날씨에 야외 공공장소가 문을 열리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나는 뻔한 사실을 외면했던 것 같다. 내가.. 이 날씨에.. 기차를.. 한 시간 타고.. 왔는데.. 설마.. 내 운빨이 그렇게 안 좋겠어.. 설마.. 하필 나겠어?
축구장에서 시내로 돌아오는 길이 그렇게 허탈할 수 없었다. 바람은 더 강하게 불어 삼단 우산이 계속 뒤집혔고, 나는 우산의 끄트머리 철심을 잡는 한편 중간중간 구글맵을 꺼내 몇 미터 남았는지 계속 확인하며 걸어야 했다. 왜 이렇게 미터가 줄어들지를 않던지.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 거리는 더디게 좁혀졌다. 와중에 포르투갈 가이드북 전자책을 꺼내 다음 갈 곳을 훑어 내렸다. 제너레이션gnration이라는 복합 문화 전시공간에 가기로 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곳이 그냥 가장 가까웠다.
도착한 전시공간에 들어가자 내 몸을 감싸 오는 에어컨의 공기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1층에서는 일본인 작가의 미디어아트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나는 홀로 어두컴컴한 전시실 내에서 우산을 내려놓고 무기력한 상태로 영상을 시청했다. 우주의 멸망을 보여주는 듯 사이키델릭한 미디어 아트였는데, 강렬한 그 느낌이 딱 나의 오늘처럼 느껴졌다. 어쨌든 에어컨이 빵빵한 전시관 안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니, 축축한 바짓단과 에코백도 마르고 생각도 돌아왔다. 이제야 좀 허기도 졌다.
전시공간을 대충 훑어본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이 화장실을 설명하기 위한 길고 긴 서두에 불과하다. 간단하게 먼저 설명하자면, 두 달 전 나는 ‘화장실’이라는 주제에 미쳐있었다. 다양한 젠더가 걱정 없이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 신체적 약자가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 개인의 건강권이 보장되는 화장실… 미래의 이상적인 화장실에 대해 고민하던 와중, 우연히 오게 된 브라가의 전시공간에서 가장 이상적인 화장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때의 기분은 고고학자가 숨겨진 선시시대 집터를 발견했을 때와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화장실이 주제가 아니니, 좋은 화장실에 대한 고찰은 생략하겠다. (추후 화장실에 대한 글은 <마이너리티 리포트> 매거진에 따로 쓸 예정이다. 대신 당시 인스타 스토리에 주야장천 올렸던 제너레이션의 화장실 사진을 아래와 같이 첨부한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양한 각도로 칸마다 사진을 찍고 (아무도 없었다), 변기에 앉아 화장실에 대한 메모도 했다. 비록 오늘 비록 축구장은 못 봤지만, 쩌는 화장실을 봤으니 소득이 없지는 않군. 어떻게든 뭐라도 건지는구나. 빡센 하루의 전부 까지는 아니고 한 30프로 정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신 승리를 매우 잘하는 사람이며 어떤 안 좋은 상황에서도 교훈을 얻는 '좋은 경험 빌런'이다. 하지만 브라가 화장실에서 돈오(頓悟)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안 좋은 여행이란 없다..!”와 같은 일반화로 점철된 결론을 내는 것은 나도 딱 질색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여행자는 하루를 안 좋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본능 때문에 작은 것 하나에 의미부여를 하며 좋은 것을 발견하는 재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여행자는 어떻게 해서든 이 하루를 좋은 날로 남기기 위해 추억 찾는 다람쥐처럼 (나의 경우는 화장실 사진을 찍는 변태 개저씨의 모양새였지만) 뽈뽈 돌아다닌다.
만약 내가 화장실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브라가 대성당에서 본 어마어마한 천장을 통해 대리 정신승리를 하지 않았을까. 만약 내가 축구장도 못보고, 화장실도 못보고, 브라가 대성당도 못봤다면, 뭐 비싼 레스토랑이라도 가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 해서든 이 빡세고 슬픈 하루를 다르게 기억하기 위해 새로운 시간과 장소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남기겠지.. “비록 축구장은 못봤지만, 최고의 레스토랑을 만났으니 오늘은 소득이 없는 날은 아니다 …”
망친 하루를 살리기 위한 여행자의 심폐소생술. 그게 모든 여행자의 본성인지는 모르겠다. '정신승리'라고 자조적으로 말하지만, 나에게는 이 정신승리야말로 꽤 건강한 멘탈 관리 노하우다. 운이 나쁜 하루는 있어도, 완전히 망친 하루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