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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Feb 15. 2019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

여행을 하다보면 그런 순간이 온다


포르투갈의 남단엔 카스카이스Cascais라는 해안 도시가 있다. 한때 포르투갈 왕가의 거주지였던 이 곳은 1년 중 260일이 맑고, 야자수와 아름다운 백사장으로 유명하다. 리스본의 로컬들에게는 여름 휴양지로, 여행객들에겐 세상의 끝이라 여긴 카보 다 호카를 가기위해 잠시 묵어가는 여행지로도 알려져있다. 나에게는 포르투갈의 건축가이자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소토 드 모라의 “파울라 레고 미술관Museu Paula Rego”를 보기 위해 가야하는 도시였다.


신트라Sintra 답사를 마치고 카스카이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6시가 넘었다. 당일치기로는 어려울 것 같아 미리 아고다에서 숙소를 구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잠시 잠만 자고 다음날 오전에 바로 미술관으로 갈 계획이었기에, 나는 카스카이스에서 2만원하는 4인실 혼성 도미토리에 묵게 되었다. 호스트는 오늘은 나 포함해 여자 2명만 묵으니 운이 좋다고 했다. 체크인을 하러 갔을 때만 해도, ‘그래 하루 자기 나쁘지 않네’라고 생각했다….


해안가 근처의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에 와인, 디저트까지 먹고, 해안가를 걸으며 감상에 빠지기도 한 나는 컨디션 최상의 상태로 숙소에 복귀했다. 그때가 9시 정도였나, 아직도 옆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간단히 씻고 나와 잘 준비를 하다가, 문득 옆자리 침대는 아주 오래된 생활감이 묻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낡은 외투가 두 세개 걸려있고, 크기가 다양한 수건, 머리맡에 둘러 쌓인 수많은 잡동사니… 장기 숙박자인걸까, 잠시 생각하다 잠에 들었다.




잠을 자다 소음에 눈을 번쩍 떴다. 다른 게스트가 온 것 같았다. 핸드폰을 보니 11시 반쯤이었다. 옆 침대의 게스트는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눕는 것 같았다. 나도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런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성은 포르투갈어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내가 옆에 있는데도 전화를 하는 구나. 나는 내가 깨어있다는 기색을 내기 위해 몇번 기침을 내고 자리를 뒤척였다. 헤드폰을 끼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나는 전화를 하는 그 목소리만 또렷히 들렸다. 시계를 보니 12시였다.


결국 나는 몸을 일으켜 시간이 늦었으니 전화를 꺼달라고 영어로 말했다. 그 분은 50대에 가까워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 여자는 나에게 별 대꾸는 없었고, 나는 다시 이불을 덮었고, 포르투갈어지만 무언가 수화기 너머 상대에게 인사를 하는 말이 들리고 통화가 종료되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중얼거림 뒤에 내 귀에 들리는 전자음의 번역투,


“Hello, Darling”


그 여성분은 번역기를 통해 이 새벽에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것도 달링이라니. 그분은 다시 번역기를 돌리더니 자신은 영어를 할 수 없다며, 나에게 핸드폰을 건냈다. 나는 그 여자의 핸드폰을 붙잡고 황당한 채로 '밤이 늦었다'고 하고 돌려주었더니… 그분은 다시 번역 어플을 통해 나에게 몇시인지 알려주었다. 아, 제가 시간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나는 어플이 알려주는 이 새벽의 시간을 들으며, 아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구나, 이 사람은 나와 굉장히 다른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급하게 굿 나잇 인사를 했다.


지금에야 회상하며 글을 쓰지만, 당시 나는 포르투갈 해변가의 도미토리 침대에 누워있는 내 자신이 나 같지가 않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그 시공간이 기기묘묘했다. 그 사람이 뭘하는지 아주 궁금했고, 얼마나 여기에 묵었을까, 이 해변 도시에서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핸드폰이 헬로 달링으로 번역했다면, 실제 포르투갈어로는 어떻게 말했을까... 온갖 질문에 머리 속을 떠다녔다. 그 와중에 더군다나 도미토리의 아래층은 나이트였다. 엄청난 음악 소리와 진동이 밤이 깊어갈수록 크게 들렸다.


나는 그 카스카이스 해변에서의 1박이 긴장되고 두근거려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에서 저자 기시 마사히코는 “여행 도중엔 두번 다시 원래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지점이 있다… 그때는 자칫하면 어디론가 끌려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때 아주 낯선 해안 도시에서 내 자신이 증발하는 상상을 했던 것 같다. 밖에는 호스트도 있고, 그 아줌마는 위협적인 사람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랬다.




200일 가까이 여행을 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낀 순간은 또 있었다.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있을 때, 나는 강 건니 시골 마을인 트완테Twante의 도자기 마을에서 장인을 만나는 가이드를 신청했다. 당일 알고보니 신청자는 나 한명이었다. 나는 미얀마 남성 가이드와 같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넜고, 트완테에 도착해서는 이미 대기하고 있는 기사를 만나 승용차를 타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10분, 20분..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차창 밖으로는 논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뒷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내 인생이 끝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쿵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때 예정된 루트대로라면 먼저 사원을 가야했다. 하지만 어슥한 길 중간에서 승용차는 멈췄고 운전을 하던 기사는 그대로 가이드만 혼자 내렸다. 인생에서 이렇게 ㅈ됐다고 느끼는 순간이 없었다. 몇분 후 가이드는 다시 조수석에 앉았다. 그리고 뒷자리의 나에게 구멍가게에서 산 옷핀을 줬다. 나의 원피스가 노출이 심하니 옷핀으로 집으면 사원에서 별 말을 하지 않으리란 것이었다.


그때의 감정은 기묘하다고 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 근방 20km의 원 주위에 한국어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고, 이방인 정도가 아니라 대우주의 굴 한마리 정도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순간. 이 곳에서 나 하나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겁이 많고, 사람들이 많은 곳만 가고, 인터넷에서 인증된 곳만 가며, 아프리카나 남미, 인도 같은 곳에는 관심도 없고, 안전주의를 최고의 덕목으로 꼽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여행을 오래한 탓인지 내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왔다.


그때는 공포라는 감각을 떠나, 마하시코가 말했듯이, “두 번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감각을 느낀다. 그런 순간은 때때로 찾아온다.






카스카이스에서 만난 그 중년의 포르투갈 여성은 다음날 아침 7시에 기상해 요란하게 씻고 나갔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일지, 아직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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