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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Feb 14. 2019

세계의 끝이라는 의미부여

포르투갈 리스본(Lisboa) 근교의 호카곶


게으른 나를 방 밖으로 내쫓는 것은 역시 의미 부여다. 

이를테면 ‘세계의 끝’ 같은 것.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기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는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호카곶 Cabo da Roca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에 자리잡은 거친 절벽인 호카곶은 14세기 말 까지는 세계의 끝이라고 믿었던 곳이다. 호카곶의 십자가에 달린 큰 기념비에는 포르투갈의 대문호 루이스 카몽이스가 쓴 말이 쓰여져 있다. 


“이 곳에서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Onde a terra acaba e o mar começa)”


나는 호카곶에 가지 않으려 했다. 며칠간 강행된 답사 일정으로 몸이 지쳐있기도 했고, 건축 기행이라는 나의 여행 컨셉에도 맞지 않았다. 나는 포르투갈 여행의 컨셉을 건축 답사로 잡은 이후부터 자잘한 것들을 패스하는게 가능해졌다. 이를테면 포르투갈에서 파두를 안봐도, 포트 와인을 마시지 않아도, 에그타르트를 먹지 않아도 괜찮지만 알바로 시자와 소토드 모라의 건축은 무조건 가봐야 한다는 식이다. 일몰과 일출은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시자의 모라의 이 건축은 여기서만 볼 수 있다! 달랑 기념비 하나가 서있는 호카곶의 절벽은 안가도 그만이었다.


세계의 끝이라는 말은 식민주의적 세계관을 내포한다. 유럽과 미국이 있는 쪽이 ‘북반구’라는 개념 자체도 서양인들의 사고 방식이고, 유라시아 대륙에서 육지가 끝난다는 것도 그들의 입장이다. 세계의 끝? 모든 대륙의 끝은 세계의 끝일까? 서구가 여기서 대서양을 항해하고 숨겨진 대륙을 발견했다면, ‘우리는 발견당한 것들인가?’ 하지만 우리는 언제든 그런 스토리텔링에 넘어가고 싶다. 왜냐하면 ‘세계의 끝’이란 단어는 무언가 종말과 신세계를 연상시키고, 황태 같이 딱딱하게 마른 내 감수성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카스카이스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리스본으로 가는 국철 열차를 탈까 호카곶으로 가는 417 버스를 탈까 고민하다 버스를 탔다. 그래도 세상의 끝이라는데, 한번은 가봐야지. 그렇게 별 기대없이 도착한 바닷가의 절벽에서, 나는 내 시야에 담기지 않는 선명한 지평선과 파도를 느꼈다. 하얀 뭉게구름이 호카곶에 등대에 걸쳐져 있고, 깎인 절벽으로는 하얀 파도가 몰아쳐 부서졌다. 지평선을 보다 몸을 돌리면, 온갖 초록으로 가득한 골짜기가 나를 반겼다. 


호카곶


거기서 난 뜻밖에도 항상 처참하게 실패했던 나의 일출 경험을 떠올렸다. 2018년 한 해를 근사하게 시작하고 싶어서 나는 대만의 최남단 가오슝에 갔고, 1월 1일의 새벽에는 수많은 관광객들과 오밤중에 버스를 타고 켄팅 해변으로 일출을 보러 갔다. 그날 나는 시커멓게 태풍을 몰고 다니는 먹구름만 봤다. 태국 빠이에서 윤라이 전망대를 갔던 날은 또 어떤가. 여러 의미를 부여하며 새벽같이 동행들과 나갔지만 이 날도 나는 햇빛 한 줄기 볼 수 없었다.

 


처참하게 망했던 나의 일출 투어 (대만 켄팅 / 태국 반자보 전망대)



하지만 별 기대없이 온 호카곶에서 완벽한 날씨와 아름다운 바다를 마주한 나는 이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여행에서의 의미부여와 친분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의미부여라는 건,  “얼마나”나 아니라, “어떤” 의미이냐가 중요했던 건가 보다. 사람마다 부여하는 의미가 다를 뿐. 호카곶은 세계의 끝이라는 근사한 말보다, 실패로 점철된 내 투어를 희생시켜 준 어떤 경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항상 과도한 감정이입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우울하지만 아름다운 파리와 파리지엥" 같은 거. 하지만 모든 것에 의미를 잘 부여하는, 능수능란하게 감정 이입을 잘 하는 사람이야말로, 여행자로서는 적격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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