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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May 05. 2019

헤드폰 끼고 여행하는 사람

소음에 대한 단상


장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단 하나의 물건을 추천할 수 있다면 

나는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강력하게 추천할 것이다. 




삼개월간 이어진 내 유럽여행은 BOSE의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 완성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획적인 소비는 아니었다. 코스트코에서 우연히 BOSE의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QC 35를 시착하는 순간, 시끄러운 쇼핑몰 매장 안에서 나와 음악만 존재하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그렇게 약 37만 원을 호가하는 헤드폰을 할부로 지르고 제대로 뜯지도 않은 채 여행길에 올랐다. 이 헤드폰의 묘미는 비행기에서 발휘되는 거라며...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과 함께하는 비행은 이전의 비행과는 전혀 달랐다. 기존에 들리던 소음이 100이라면, 이제 체감상 20 정도만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비행기 이착륙 같은 거대한 노이즈도 걸러주니, 일반적인 말소리는 거의 완벽하게 차단한다. 이러한 노이즈 캔슬링 기술은 원치 않는 노이즈와 동일한 반대 신호(보정 신호)를 생성해 두 소리를 결합시켜 노이즈를 줄이는 나름 최첨단 방식이라고 한다. 이 기술을 몰랐을 때는 '이렇게 큰 헤드폰으로 귀를 막으니 당연히 소리가 안 들리는 거 아니야?' 싶었는데, 노이즈 캔슬링 모드를 해지하고 헤드폰을 쓰면 안 쓴 것보다도 소음이 더 크게 들린다. 귀에 소라를 대면 고동 소리가 더 잘 들리는 원리랄까. 


자체 앱도 너무 이쁨. 노이즈 캔슬링의 레벨도 지정할 수 있다.


여행하는 내내 이 헤드폰을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다. 긴 비행이나 야간 버스를 탈 때, 숙소 방음벽이 약해 옆 방의 말소리까지 들릴 때. 내가 묵었던 숙소의 대부분은 오래된 빌딩의 에어비앤비였다. 공사라도 하는 날에는 노이즈 캔슬링의 힘을 빌어 숙면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헤드폰을 끼면 옆으로 못 눕기 때문에 정자로 자야 한다) 나는 긴 여행 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로컬 카페에서 작업했는데, 이 때도 헤드폰만 끼면 빠르게 집중 모드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소음에 예민한 편이었다. 공식적인 모든 시험(수능, 토익 등)을 치를 때도 항상 귀마개를 꼈다. 조용한 정도가 아니라 세상과 차단되었다는 적막한 느낌의 상황에서 집중력이 발휘되는 타입이다. 그러니 이 헤드폰은 내게 신세계일 수밖에. 엄밀히 말하자면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은 음질이 엄청나게 좋은 것은 아니다. 안 좋은 소리를 과감하게 차단해주는 '마이너스 효과'가 핵심인 기기다. 


보통 이동 중에는 헤드폰을 사용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소리가 너무 차단되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익숙해진 도시의 길에서는 가끔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산책하기를 즐겼다. 아무 소음도 없이 음악을 들으며 낯선 도시를 걸으면, 이건 오롯한 나만의 여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베카 솔닛의 책에서 발견한 표현을 빌리자면, "거리를 파괴하는 산책자"가 되는 느낌이었다. 




사진 BOSE 제공





하지만 모든 소음을 차단하고 살 수만은 없는 일이다. 소음을 차단하는 헤드폰을 찬양하고 있으니, 여행지에서 소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소리를 소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소음을 차단하느라 꼭 들어야 하는 여행의 소리마저도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언젠가 한번 스페인의 한인 민박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할 때 내 헤드폰을 책상에 올려둔 적 있다. 헤드폰에 관심을 갖던 사장님은 이리저리 내 헤드폰을 만지더니 말했다.  


“여행지에서 헤드폰 끼고 다니는 것만큼 바보 같은 게 없지”


사장님의 말뜻을 이해한다. 그곳이 어디든, 여행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이 있다. 우연히 들어간 대성당에서 오래된 건물 냄새를 흠뻑 맡으며 성가대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벅참은 여행자만이 마주하는 공감각적인 경험이다. 세상의 끝이라는 호카 곶에서는 절벽에 철썩철썩 부딪히는 파도 소리에 한참을 서있기도 했고, 때로는 그저 벤치에 앉아 사람들의 웃음소리 나 바람소리, 낙엽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수없이 멈춰 섰던 길거리의 버스킹은 또 어떤지. 우리는 어떤 여행은 소리로 기억한다. 이런 모든 소리를 헤드폰을 끼고 차단한다면 정말 바보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사장님의 말이 불편했던 이유는 각자의 방식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방법론을 무시하는 것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감상에 빠질 순간과 혼자 나에게 집중할 시간을 구분하는 방법은 여행자마다 다 다르다. 쉽게 타인의 여행을 본인 기준으로 재단하는 발언은 그래서 불편했다. 


사실 소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관적이다. '불규칙하게 뒤섞여 불쾌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소음이라지만, 무엇을 불쾌하고 시끄럽게 느끼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카페에서 큰 소리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기계 소리를 소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아니다. 나처럼 소음에 예민한 사람이라고 해서 매번 헤드폰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때로는 음악을 듣거나, 적막에 빠지거나, 현지의 소리를 만끽하는 순간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나간다. 


나에게는 월별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여행을 시작한 이후부터는 월별 플레이리스트는 그 나라를 기억하는 환기의 도구가 되어주었다. 9월은 치앙마이 리스트가 되었고, 2월은 리스본 리스트가 되었다. 언젠가 사운드 클라우드에서 특별한 플레이리스트를 본 적도 있다. 음악의 제목은 날짜와 도시로 조합되어 있었는데, 여행의 평범한 순간을 그저 녹음한 소리였다.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 주변 사람들이 발자국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웅웅대는 대화 소리... 당시의 현장을 그대로 담은 백색 소음이었고, 그 소음 자체가 하나의 음악이 되었다. 여행의 소리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방법은 이렇게 사람마다 다양하다. 


내 월별 플레이리스트 



가끔은 현지의 소리보다, 이 순간에 딱 맞는 하나의 노래가 절실할 때가 있다.  적절한 순간에 맞이한 음악, 혹은 적막은 여행지의 감상을 배가시켜준다. TPO에 걸맞은 소음과 소리를 고르는 것은 여행자의 몫이다. 언제 듣고, 언제 안들을 지는 여행자가 선택하면 그만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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