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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Sep 13. 2018

여행균의 감염

사막의 중심을 향해 걸어가다

 

여행균에 감염된 건 아마 


2017년 봄, 어렵게 휴가를 내 친한 회사 동료와 라오스로 떠났다. 10일 정도 되는, 당시 회사에서 낼 수 있는 모든 연차를 긁어모은 휴가였다. 우리가 라오스를 가기로 결심했던 건, 무언가 때 타지 않고 숨겨진 보석 같은 여행지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사실 <꽃보다 청춘> 같은 TV 프로그램에 자주 노출된, 이미 한국인들이 포화상태인 곳이라는 걸 늦게야 알아차렸지만.


우리는 알차게 라오스를 정복하고 돌아오겠다는 포부로 꽉 찬 일정을 짰다. 수도 비엔티안에서는 짧은 무박 2일을 보내고, 액티비티의 도시 방비엥에서는 푸른 에메랄드 빛 호수에 다이빙도 하고, 루앙 프라방에서는 승려분들의 탁발 행렬에 보시도 하고 말이지… 심지어 여행 경비 대비 과한 부티크 호텔을 과감히 결제하기도 했다. (그곳은 지성과 이보영의 신혼여행 숙소로, 야외 월풀 욕조가 있는 프라이빗한 숙소였다..) 하지만 이 모든 아름다운 여행지를 뒤로 하고 가장 여운이 남는 곳은, 수도 비엔티안이었다.


비엔티안은 라오스의 오래된 수도지만, 여행자들에게는 방비엥이나 루앙프라방 등 유명한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곳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나는 이 비엔티안이, 정확하게는 삶에 급한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어 보이는 유유자적한 비엔티안의 여행자들이 좋았다. 대낮부터 아무도 없는 한적한 바를 연 주인이나, 그곳에서 두꺼운 안경을 끼고 책을 읽는 사람, 노트북으로 신중하게 타자를 치며 글을 쓰는 사람. 그들은 한 곳에 길게 머물렀지만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10보 걸을 때마다 사진 찍기 바쁜 단기 여행자였던 나는 라오스 여행 이후 어떤 강한 욕구에 사로잡혔다. 그건 바로,


"아주 길고, 느긋한 여행을 하고 싶다"


그로부터 1년 후, 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것도, 미얀마에 가는 비행기에 올라 10개월에 가까운 긴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모든 사건의 원인(원흉?)에는 2017년 라오스 여행이 심은 욕망의 씨앗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명치를 지나 발끝까지 가라앉은 어떤 욕망이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한 여름에 회사를 그만두고 그보다 더 뜨거운 동남아로 떠난 것은 아닐까? 그때 나는 라오스에서 어떤 여행균에 감염되어 온 것은 아닐까?


라오스를 여행한지 1년 후,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홀로 긴 여행을 떠났다. 




방을 나가지 않는 여행자


그렇게 미얀마와 태국, 스페인, 포르투갈, 베트남을 거쳐 10개 도시의 26개 방에서 10개월간의 여행을 했다. 한방을 빌리고 그 도시의 비자가 끝나는 기간동안 퍼질러있다가, 익숙해질 때쯤 다시 익숙하지 않은 도시의 방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내가 느낀 건 단 하나,


나는 방을 나가지 않는 여행자구나. 일관성 없는 내 여행을 이어주는 단 하나의 공통점은 모든 도시에서 자기만의 방을 만났다는 것이었다.“사막의 중심을 향해 걸어갈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이 구체적으로 보인다.” 권운지의 시처럼 나는 그  방에서 구체적으로 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내향적인 여행자가 낯선 도시의 26개 방에서 보낸 10개월간의 기록. 

"결국 모든 곳에서 나는 단 하나의 방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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