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여행한지 한 달,

나는 여행을 왜 하는가?

by 사과집

Day26/ Mandalay, Burma / 9.15


오늘은 미얀마에 있는 마지막 날이다.


미얀마에 한달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미얀마를 모른다. 다만 나를 잘 알게 됐다. 짧은 여행에선 알 수 없었던, 아니 알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던 나에 대해서. ‘잠깐 하는 여행’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우연이나 특수한 상황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러나 여행이 길어지고, 그 특징이 반복되면 점차 확신한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나는 엄청난 무사고주의자, 천성이 불안한, 프로세스에 대한 통제 욕구가 높으나 문제가 생겼을 땐 침착한 사람(침착은 돈에서 나온다). 미식에 대한 욕구가 낮고, 강렬한 한방 보다는 자잘한 여러방, 수정의 여지가 있는 것을 좋아하는, 스폿 보다는 에트모스페어 주의자. 도시의 루트에 대해서는 무계획을 지향하지만 삶의 여정에 대한 계획 강박이 있는 사람. 디지털 노마드를 꿈꾸지만 정착된 공간을 욕망하는, 정착지향자. 그리고 게으름뱅이. 물리적 시간이 생각할 시간을 앞지르지 못하고, 생각할 시간이 글쓰는 시간을 앞지르지 못하는 잡념의 소유자.


퇴사를 하면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시간이 많을 줄 알았지만 늘어난 시간보다 빠른 배속으로 아이디어와 잡념이 폭발한다. 그래서 퇴사한 지금 시간이 더 부족하다고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아온 한 달의 시간 동안, 나는 하고싶은 것이 없는게 아니라 하고싶은 것을 도전할 자신감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디어와 그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나만의 시간 안에서 나는 작은 시도를 반복하고 자신감을 얻는다. 당신에게 일정 기간의 백수를 추천하는 이유다. 직장인 갭이어 추천드려요.


육아 말고 그냥 휴직도 가능하면 을마나 좋게요. 적어도 대리 진급 이후에는 직급연차에 한번 정도 본인이 원하면 두달까지는 쉴 수 있는 휴식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함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큰 무기력에 빠졌다. 그 무기력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을 갔다. 삶은 일과 수면으로만 나뉘고, 나의 일상을 돌볼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아 방은 쓰레기로 가득찬 돼지 우리가 됐다. 퇴근 버스를 타고 그 혼란의 방에 도착하면 더 무기력해져서 밥도 밖에서만 사먹고 주말에도 누워만 있거나 집에 아예 들어가지 않는다. 내 몸의 터전인 집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나를 오히려 집에서 쫓아냈다. 그런 <무기력의 주간>에는 사람도 만나지 않고 책도 쓰지 않고 글도 쓰지 않는다. 돌려본 넷플릭스만 보거나, 가끔 피아노 학원에 가서 익숙한 곡만 친다. 그러다 어떤 특정한 시기, 보통 사흘 이상의 긴 휴가를 갖게 되거나 집에 누군가 오게되는 사건 등,을 거치고서야 쓰레기같은 일상에 경각심을 느끼고 방을 청소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을 집으로 부르기도 했다. 억지로라도 청소하니까.) 내가 인스타그램에 깨끗한 방 인테리어 사진을 올렸을 때는 백이면 백 이 무기력에서 벗어났을 때였다.


나는 왜 여행을 하는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기력에 빠지지 않는 일상이다. 낯선 도시는 언제나 내게 낯선 감각을 유지시켜 준다. 내가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스트레스는 무기력에 빠질 여력을 주지 않는다. 불안은 여행자에게 불규칙적으로 찾아오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히면 심장은 미친듯이 쿵쾅거린다. 역설적으로 이런 순간은 문제를 해결하는 성취의 기쁨도 가져다 준다. 그러다 이러한 일상에 익숙해지면, 다른 곳으로 떠나면 된다.


요즘 내게 뿌듯한 하루는 많은 곳을 돌아다닌 날이 아니다. 그저 내가 세운 오늘의 할 일을 잘 마쳤을 때다. 글을 쓸 때, 책을 읽을 때, 업무 메일에 답장을 할 때, 그리고 아주 잠깐이라도 여행지를 산책하는 여유를 빼두지 않았을 때. 그런 날이 더 뿌듯하다. 그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만보 이상 걸은 날은 나에게 말한다. “오늘 쓸데없이 많이 걸었어.” 적당한 체력과 시간을 배분해서 지치지 않는 호흡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


남은 미얀마 돈은 환전하지 않았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 나라에 다시 올 것 같아서.


IMG_2107.JPG 치앙마이의 서점, 린라오 서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에게 좋은 숙소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