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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씨 Jun 07. 2018

You complete me.

능숙한 사랑 고백

"현수 씨는 유 컴플리트 미라는 대사 들으면 무슨 영화 생각나세요?"


멍하니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그녀의 움츠린 어깨에 왠지 모를 지루함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말을 던졌다.


"네? 유 컴플리트 미…? 음… 아 그거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배트맨한테 하는 대사잖아요? 조커가 진짜 끔찍하게 사랑스러웠죠 크크. 유 컴플리트 미이이이이”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성대모사를 하는 그녀의 표정이 매우 귀엽긴 했지만 생각하지 않았던 대답이었기에 당황했다. 아 그 대사가 다크 나이트에서도 나왔던가? 


"어... 그쵸. 근데 닥나에도 나오긴 하는데 혹시 제리 맥과이어라는 영화 알아요? 거기서 톰 크루즈가 여자 친구한테 하는 유명한 대사기도 한데 "


현수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곤 눈망울을 굴리더니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입을 벌렸다.


“아 맞다 맞다. 그거 르네 젤위거랑 톰 크루즈 나온 영화죠? 거기 르네 젤위거 애기로 나온 꼬마애가 정말 귀여웠는데! 근데 그 영화 너무 옛날 영화 아니에요? 기훈 씨 또 이렇게 나이 인증하시네요? 완전 아재 감성”


그렇게 오래된 영화였나?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봤던 영화니 20년도 훨씬 넘긴 했군. 뭔가 지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영화를 좋아한다는 그녀의 취향에 맞게 준비한 소재였는데 이렇게 망칠 순 없지. 침착하자 침착해.


"그래도 영화에서 사랑 고백하는 멘트로는 올타임 순위에 들어갈만한 대산데… 아재라기 보단 클래식하다고 해줘요.”


“네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근데 기훈 씨 멜로 영화 좋아했었어요? 명대사를 다 외우고 다니고.”


“유 컴플리트 미나 투 비 어 베러 맨 같은 명대사는 기본 상식 아니겠습니까?"


"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잭 니콜슨 나온 영화 맞죠? 영어 스터디할 때 스크립트를 달달 외워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죠!"


폰 화면에서 잠깐 눈을 뗀 그녀의 눈빛에 공통 화제를 능숙하게 끌어낸 나에 대한 호감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나의 이런 시답지 않은 멘트에도 일일이 반응해주다니. 역시... 이 타이밍. 놓치면 안 될 것 같다. 지금이다.


"그런데 둘 다 좀... 이젠 진부하죠?"


"진부해요? 뭐가요?" 


"당신이 나를 완성시켜.... 아니면 당신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 같은 말들.  현수 씨 말대로 20년도 넘은 대사니까. "


"그래도 명대사잖아요? 올타임 넘버원 멘트들이라면서요 기훈 씨가 흐흐."


"2018년 오늘 여기서 지금 하는 사랑 고백에는... 좀 진부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순간 그녀의 움찔하는 기척이 긴장된 공기를 타고 전해진다. 


"... 물론 지금 하는 이 말들도 진부하고... 혹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 현수 씨한테 말 나온 김에 꼭 하고 싶었어요... 현수 씨는... 제가 우울증과 자기혐오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그럴듯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의욕을 주는 사람이에요. 현수 씨 덕분에 전 처음으로 건강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어요?"


"음... "


그녀는 머리 속에서 대답할 말을 찾는 것처럼 손에 쥔 스마트폰의 화면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긴장될 거야. 천천히 대답해도 돼, 내가 이렇게 조바심이 나는데 넌 얼마나 떨리겠니.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의 대답은 곧 물 흐르듯 거침없이 내 명치 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저기 기훈 씨가 아픈 건 안타까운 일이고 뭐 본인이 치료되길 원하는 건 다행이긴 한데요... 그게 저 때문이라는 얘기를 하는 이유는 대체 뭐죠? 그게 뭐 의미가 있어요?"


"네?"


미처 예상하지 못한 그녀의 답변에 나는 순간 말을 잊지 못하고 그녀의 찌푸린 미간만 멍청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게 뭐 사랑 고백... 뭐 그런 거예요? 사실 전 기훈 씨가 무슨 소리를 해도 마음을 받아주거나 사귀거나 할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긴 한데... 뭐 제가 그쪽에 오해할만한 짓을 아마 한 것 같기도 하니 그 부분 오해하신 건 안 따질게요.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네요."


여전히 고개도 들지 않고 스마트폰 화면만 보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모래밭을 한 바퀴 구른 자석 마냥 짜증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다.


"대체 나 때문에 기훈 씨가 더 나아지고 싶은 의지가 생긴다는 게 내가 그쪽 마음을 받아주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뭐죠? 그 두 가지가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는데요? 봐봐요. 방금 하신 그 고백인지 뭔지가 되게 그럴듯하게 느껴졌죠? 근데 내가 듣기엔 그냥 아... 저는 하자가 있는 사람인데요... 이제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는데 만약 당신이 내 마음을 안 받아주면 그게 어려워 질지도 모르겠어요... 뭐 이런 협박이나 궁상 같이 들려요. 지금 저한테 협박하시는 거예요?”


“...”


“그리고 심지어 지금 기훈 씨가 직접 본인이 지금 환자고 자기혐오에 빠져있을 만큼 하자가 있다고 말한 거 알죠? 제가 좋으면 나한테 뭔가 메리트가 있는 얘기로 꼬셔볼 생각을 해야지 내가 기훈 씨한테 중요하다는 얘기만 일방적으로 떠들면 뭐해요? 아 착각 하진 말아요. 혹 나한테 뭐 이득이 될만한 얘기를 했어도 내가 그쪽이랑 만날 일은 없으니까. 그저 좀 그림 좋게 끝낼 순 있었겠죠.”


“...”


“나 없으면 안 돼요? 나 때문에 나아지고 싶다고요? 나 때문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고요? 난 기훈 씨가 대충 살던지 그저 그런 사람이 되던지 미완성품이 되던지 상관도 없고 설사 그 뭐 병이 다 낫고 더 나은 사람이 된 모습도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이에요. 아프면 병원에 가요. 나한테 이러지 말고!”


그녀는 지갑을 뒤적이더니 5천 원짜리 지폐를 한 장 꺼내 놓고 일어섰다.


"저 가요. 앞으론 연락하지 마요. 나이도 있는 사람이 뭐 병이 났네 우울하네 매번 궁상떨길래 좀 안타까워 보여서 말 상대나 해줬더니 이런 식으로 주제넘게 구시면  예의가 아니죠. 내가 애매하게 말하면 또 오해하거나 쓸데없이 이상한데서 원인을 찾거나 할 거 같아서 확실하게 말해주는 거예요. 앞으로 그렇게 본인 망상 속에서만  살지 말고 현실을 보라고요. 거울도 좀 보시구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내 앞에는 입도 대지 않은 물컵과 지폐 한 장만 남아 있었다. 세상에... 커피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보다 더 빠를 수가 없네.


어쨌든 깔끔하게 You complet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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