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화에는 부동산이 있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배경은 1990년대 서울입니다. 대학생인 승민과 서연(배우: 이제훈, 배수지)이 CD플레이어로 전람회의 신곡 '기억의 습작'을 듣는 장면이 나오니 대략 1994년 정도인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약 30년 전인 1990년대 초 서울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영화에는 모두 네 채의 집이 나오는데 기억나시나요? 승민이가 사는 강북 정릉의 집, 서연이가 이사가는 강남 개포동의 집, 서연이가 이사가려는 제주도의 집, 그리고 마지막은 두 사람이 발견한 동네의 빈집입니다. 1990년대 대학생 서연이에게 강북은 현실이지만 강남은 미래입니다. 그렇게 동경하던 강남으로 이사를 갔지만, 시간이 흘러 서른이 넘은 서연이에게 서울은 엉망이 되었고 제주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죠.
<응답하라 1988>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1970~80년대는 서울이 동서남북으로 급격하게 팽창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1970년대 방식과 1980년대 방식이 조금 달랐죠. 1970년대에는 주택을 중심으로 조금씩 확장되었다면(주택개발촉진법), 1980년대에는 토지를 중심으로 크게 확장됩니다(택지개발촉진법). 쉽게 말해 스케일이 커진거죠.
이렇게 되면 같은 서울이라도 기존의 주거지역과 새로 조성한 주거지역의 차이가 발생하겠죠. 높은 언덕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있는 승민이네 집은 전자에 해당하고, 서연이가 이사 간 개포동의 빌라는 후자에 해당합니다. 극중 재욱(배우: 유연석)이 서연이에게 말하는 '압서방', 즉 압구정동, 서초동, 방배동은 1990년대 서울의 신흥 주거지를 대표하는 곳이고요.
'오렌지족'이라고 들어보셨죠? 1990년대 압구정동은 클럽과 명품숍이 생기면서 젊은 사람들이 몰리는 '핫플레이스'였습니다(그래서 압구정을 서울 핫플레이스의 원조로 보기도 합니다). 서초동은 1995년 대법원이 이전하면서 지금의 '법조타운'이 조성되었고, 방배동 역시 이 시기에 카페가 생겨나며 지금의 '방배동 카페거리'가 만들어졌습니다.
강남과 강북, 서울과 제주
1990년대 서울은 절대적인 주택 부족이 해소되었던 시기이자, 동시에 상대적인 주거 격차가 시작되었던 시기이기도 한 셈입니다. "너 어디 살아?"라는 평범한 질문에서 그만큼 서울이 커졌다는 사실, 커진 만큼 경제적 격차도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집이 아니더라도 컴퓨터, 자동차, CD플레이어, 게스청바지, 리복운동화까지 모든 것이 소득과 격차의 상징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강북과 강남으로 나뉘어지던 서울을 떠나 제주도의 집은 어떨까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승민과 달리 서연은 제주도에서 태어나 서울로 왔죠. 서연에게 서울은 사는 곳 이전에 음악을 하기 위한 곳, 아나운서가 되기 위한 곳, 성공하기 위한 곳이었죠. 서울을 떠나 자신을 찾기 어려운 승민과 달리, 서연은 서울을 떠나도 어린시절의 추억이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제주도의 집이 완성되어 갈 때쯤 서연은 승민에게 피아노를 놓을 방이 필요하다며 설계 변경을 요청합니다. 이제 집이 단순히 과거의 공간이 아니라 음악을 계속 하는 현재의 공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참 많은 것을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디에 살고 계신가요?
<건축학개론>
이용주 감독, 2012
건축가 승민은 어느 날 대학 시절 첫사랑이었던 서연에게서 제주도 고향집을 다시 지어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집을 설계하며 그는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만난 서연과의 추억을 되짚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며 가까워졌던 두 사람은 서연의 이사와 사소한 오해로 결국 멀어지게 됩니다. 승민은 과거를 회상하며 집을 완성해 주고, 서연은 완성된 집에서 첫사랑의 기억을 정리합니다.
"왜 집을 짓는지 알아야, 어떤 집이 필요한지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