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고시원에서 양조위를 | 화양연화

모든 영화에는 부동산이 있다

by 오성범

감정평가사는 영화에서 도시를 본다

영화 <화양연화>의 배경은 1960년대 홍콩입니다. 1949년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 본토에서 영국령이었던 홍콩으로 이주했습니다. 영화는 첸(배우: 장만옥)과 차우(배우: 양조위)가 같은 날 이사하면서 시작되는데요, 두 사람의 복색이나 말투로 미뤄보아 두 사람도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중산층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전쟁의 피해로 100만 명도 되지 않았던 홍콩 인구는 이 시기를 거치며 300만 명을 넘어서게 됩니다.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 주택이 부족할 수 밖에 없겠죠. 서울도 1980년대 전까지 청계천 등지에 판자촌이 있었듯이, 홍콩에도 '스쿼터(squatter)'라는 판자촌이 횡행했습니다. 서울이 1962년 대한주택공사(현재 LH한국토지주택공사)를 설립했듯이, 홍콩도 1954년부터 공공주택 전담부서(현재 홍콩주택청)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주택을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정부가 공공주택을 짓는 동안, 민간에서는 '탕러우(唐樓)'라는 공동주택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첸과 차우가 사는 곳이자 영화의 주요 배경이 바로 탕러우입니다. 탕러우는 5층 내외의 상가주택인데, 1층 상가를 제외한 2층 이상은 방 한 칸 크기로 작게 쪼개어 여러 가구가 사는 공동주택이었습니다. 방 안에 개별 주방이나 화장실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거실, 주방, 화장실은 공용시설이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고시원과 같은 구조였죠.


홍콩식 고시원의 추억, 탕러우


탕러우는 1960년대 극심한 주택난에 시달리던 홍콩을 대표하는 주거형태였습니다. 서울의 주거형태가 판자촌을 거쳐 다가구주택으로 변화했듯이, 홍콩의 주거형태는 판자촌을 거쳐 탕러우로 변화한 것이죠. 홍콩은 서울과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도시면적과 상주인구는 서울이 높고, 인구밀도와 소득수준은 홍콩이 높지만, 가구당 주택수는 사실상 비슷합니다. 대신 홍콩은 서울보다 공공임대주택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자가보유율은 서울보다 조금 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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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화양연화>의 배경인 홍콩의 공동주택 '탕러우'


서울에서 다세대주택과 아파트가 다가구주택을 대체했듯이, 홍콩에서도 공공주택이 탕러우를 대체했습니다. 물론 탕러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셰어하우스로 활용되거나 소규모 호텔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도 다가구주택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죠. 과거에는 4인 가구가 '어쩔 수 없이' 사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1~2인 가구가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서' 사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1996년 MBC에서 방영한 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은 한 하숙집에 사는 세 명의 청춘남여를 주인공으로 유쾌한 에피소드를 풀어냈습니다. 당시 시청률이 20%에 가까울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송승헌, 우희진 같은 스타 배우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하숙집이라는 공동주택이자 셰어하우스를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1~2인 청년 가구들은 4인 가구처럼 집에 상주할 사람도 없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도 많지 않습니다. 요리를 해서 식탁을 차릴 일도 많지 않고, 가족들과 대화하며 TV를 시청할 넓은 거실이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고요. 따라서 개인공간은 조금 작더라도 월세가 저렴한 곳이 좋겠죠(물론 일반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혼자서 지내는 건 심심하기도 위험하기도 합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다른 사람들을 마주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좋을 겁니다.


탕러우의 좁은 복도와 공용 거실은 첸과 차우를 여러 번 스쳐지나도록 만들었습니다. 탕러우가 아닌 단독주택이나 아파트였다면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겠죠. 집은 사람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설명하고 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집에, 왜 살고 계신가요?



<화양연화> | 花樣年華

왕가위, 2000


1960년대 홍콩,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첸(배우: 장만옥)과 차우(배우: 양조위). 이사 첫날부터 자주 마주치던 두 사람은 차우의 넥타이와 첸 부인의 가방이 각자 배우자의 것과 같음을 알고 그들의 관계를 눈치챕니다. 그 관계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궁금해진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면서도 서로 감정이 깊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만, 점점 서로에게 빠져들게 됩니다.


"지나간 세월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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