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영화에는 부동산이 있다
여러분은 고향이 있으신가요? 저는 마땅히 고향이라고 할만한 곳이 없습니다.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곳'인데, 저는 광양에서 태어났지만 줄곧 서울에서 자랐거든요. 저희 가족은 제가 다섯 살 때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1970년대는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고향을 떠나 도시로 모이던 '이촌향도'의 시대입니다. 이촌향도의 주역인 베이비 부머 세대(1950-1960년대생)는 요즘 유행하는 '듀얼 라이프(Dual Life)'를 처음 시도한 세대인지도 모릅니다. 태어나서 자란 곳이 있고, 먹고 살기위해 사는 곳이 따로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베이비 부머 세대의 자식인 밀레니얼 세대(1980-1990년대생)들은 저처럼 고향이 없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 아니지만, 자란 곳은 서울인 것이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어도 부모님과 친구들을 만나러 갈 고향이 없습니다. 명절에 친구들이 모두 고향에 내려가고 나면 유독 심심하고 나만 홀로 남겨진 느낌이 들기도 했었고요.
밀레니얼 세대의 자식인 젠지 세대(2000-2010년대생)는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입니다. 태어나서 자란 곳이 서울이죠. 물론 서울이 고향이 아닌 분들도 많겠지만,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는 서울과 수도권에 살고 있으니 그냥 서울이라고 하겠습니다. 고향이 없는 밀레니얼 세대와 고향이 서울인 젠지 세대, 과연 누가 더 나은 걸까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배우: 김태리)은 MZ 세대입니다. MZ 세대는 1980-1990년대에 태어난 밀레니얼(Millennial) 세대와 2000-2010년대에 태어난 젠지(Gen Z) 세대를 통칭합니다. 혜원은 보통의 MZ 세대와 달리 고향이 있습니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왔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학창시절 친구도 아직 이곳에 있고요. 혜원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공부와 취업을 위해 서울로 갔지만 언제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고향이 있습니다. MZ 세대이지만 정서적으로는 베이비 부머 세대인 것이죠.
혜원이 고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어머니 덕분이었습니다. 마치 씨앗을 뿌리고 작물이 자랄 때까지 돌보는 것 처럼, 어머니는 혜원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 남아 딸을 돌보았습니다. 이렇게 긴 시간의 기다림이 없었다면 그곳은 혜원의 고향이 아닌 그저 아버지의 고향으로 남았을 테니까요. 사람이 지역에 애착을 형성하려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할 것 같지만 그에 앞서 자기 스스로 홀로 서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홀로 서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생업이 있어야 하는데, 농촌의 생업은 곧 농사일 것이고요.
아무리 한달살기, 일년살기를 한다 하더라도 생업을 꾸리지 못하면 그곳은 타지일 뿐이니까요. 혜원의 어머니는 그저 학교만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혜원이 어머니로부터 사계절의 농사를 배우지 못했다면, 농업 외에 마땅한 일자리가 없는 곳에서 정착해서 살아갈 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독립적이지 못한 사람이 결코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고요.
'시골'은 순우리말인데, 도시에서 떨어진 지역을 의미합니다. 시골이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도시와 경계를 이룬다면, '농촌'은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경계입니다. 단지 사계절의 경관이 좋고 한적하다는 것 만으로는 시골을 설명하기에 부족한 것 같습니다. 도시에도 부족하나마 사계절이 있는 것처럼, 시골에도 엄연히 농업이라는 생업과 경제 생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일자리가 없으면 도시로 갈 이유가 없는 것처럼, 시골 역시 농사나 생업이 없으면 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시골의 발견>을 지은 오경아 작가는 '시골의 경쟁력'을 말합니다. 도시에 도시계획이 있듯이 시골에도 계획과 디자인이 필요할 뿐, 시골은 도시와 상호보완 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죠. 도시는 높은 밀도 아래 모든 것이 분업화되어 있습니다. 철저한 분업화 덕분에 하나만 잘 해도 나머지는 돈으로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효율적이지만, 반대로 거대한 시스템에서 하나만 고장나더라도 스스로 해결할 방법이 없는 무력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반면 시골의 일은 분업화 된 도시의 일보다 조금 더 독립적이고 주체적일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더 낫다기보다 분명히 차이가 있고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죠.
고향이 있었던 베이비 부머 세대들은 이촌향도 아니면 귀농귀촌처럼 도시와 시골을 경계 지어 선택했지만, 처음부터 고향이 없었던 MZ 세대는 듀얼 라이프(도시와 시골을 오가는 삶), 러스틱 라이프(시골을 꿈꾸는 삶)처럼 도시와 시골의 경계 자체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세대를 떠나 모두의 마음 속에 이미 도시와 시골이 나란히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감독, 2018
시험, 연애, 취업, 뭐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잠시 멈추고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김태리)은 오랜 친구인 재하와 은숙을 만난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삶을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재하(류준열), 평범한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은숙(진기주)과 함께 직접 키운 농작물로 한끼 한끼를 만들어 먹으며 겨울에서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다시 겨울을 맞이한다.
사계절을 보내며 고향의 의미를 깨닫게 된 혜원은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첫 발을 내딛는다.
"힘들 때마다 이 곳의 흙 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