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감정평가사의 변명
<빅 쇼트>라는 영화가 있다
2008년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건을 다룬 영화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는 sub-prime mortgage, 즉 비우량 담보대출을 의미한다.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 검증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한 가지는 기초자산인 부동산에 대한 검증(감정평가)이고 나머지 한 가지가 차입자 개인에 대한 검증(신용평가)이다. '서브 프라임'이라는 등급은 신용평가의 대상인 차입자의 등급을 말한다. 그러니까 신용등급이 좋지 못한 사람, 상환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게 해 준 부동산 담보대출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다.
은행 입장에서도 대출금의 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손해일텐데, 왜 신용등급이 낮은 사람들에게까지 무리하게 대출을 했을까. 쉽게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 이유는 애초에 은행이 이자와 원금을 받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행은 대출을 실행함과 동시에, 이자와 원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증서인 담보대출채권을 외부에 팔 생각이었다. 담보대출채권을 하나의 상품이라고 생각하면 많이 만들어 팔수록 이익이 되는데, 많이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에게 대출을 해줘야 한다. 그런데 신용등급이 좋은 프라임 고객들은 이미 충분한 대출을 받은 상태라면? 그 다음 신용등급인 서브 프라임 고객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영화에서는 이민자, 유흥업소 종사자 등 소득이 불안정한 사람, 심지어 직장이 없는 사람에게도 대출을 해줬고, 이들이 금요일 오후에 작성한 대출신청서는 월요일 오전에 대형 투자은행이 사갔다고 했다. 이 상품이 바로 주택저당증권(MBS, Mortgage Backed Securities)이다.
투자은행은 왜 서브 프라임 모기지를 샀을까
"주택 대출금을 안 갚는 사람은 없잖아요" 기본적으로 주택담보대출의 부실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것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신용평가회사들까지 해당 채권을 가치를 보증했기 때문이다. 부동산에 감정평가회사가 부여하는 감정평가액이 있는 것처럼, 채권에는 신용평가회사가 부여하는 신용등급이 있다. 당시 유수의 신용평가회사들은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 최고 등급인 AAA를 주었다.
극중 펀드매니저인 마크(스티브 카렐)가 신용평가회사 스탠다드앤푸어스(S&P)를 찾아가, 차입자의 신용이 낮은 채권에 최고 등급을 준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담당자가 머뭇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등급을 안 주면 바로 무디스로 갑니다."
신용평가회사의 고객은 채권을 만들고 파는 사람들이며, 신용평가회사는 고객이 만든 채권의 가격(등급)을 결정한다. 신용평가회사가 채권의 등급을 낮게 제시한다면? 고객은 더 높은 등급을 주는 다른 회사를 찾아갈 것이다. 신용평가회사의 선택은 둘 중 하나다. 고객이 원하는 등급을 제시하거나, 고객을 빼앗기거나. 미국의 신용평가회사 뿐만 아니라, 미국의 감정평가회사, 한국의 감정평가회사도 전혀 다르지 않은 업무환경을 가지고 있다.
서비스의 품질은 어떻게 향상되는가
이런 일에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서비스 대가를 고객이 지불해야 하고, 서비스 공급자가 여럿이어야 한다. 경쟁시장에서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조건이다. 정반대의 경우도 생각해보자. 서비스 대가를 고객이 지불하지 않으며, 서비스 공급자가 한 명인 경우. 바로 독점시장이다. 독점시장은 시장경제어서도 특정 기업의 경쟁력이나 규모의 경제로 발생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서비스 대가를 고객이 지불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다. 자연독점을 제외한 독점시장은 정부의 공공서비스 말고는 없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재판인데, 서비스 제공자(법원)이 고객(원고와 피고)으로부터 서비스 대가(재판비)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서비스 공급자가 한 명(대한민국 법원)이다.
재판과 달리, 신용평가, 감정평가, 회계감사 같은 서비스는 독점시장이 아닌 경쟁시장에서 제공되고 있다. 경제학에서는 독점시장에서 가격에 대한 소비자 결정권이 제약되고, 사회적 후생손실이 발생한다고 가르친다. 반대로 경쟁시장에서는 수요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고, 공급자 경쟁을 통해 서비스의 질이 향상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쟁시장에서 신용평가서비스, 감정평가서비스, 회계감사서비스의 질은 어떻게 향상될 수 있을까. 고객의 효용은 더 높은 등급의 신용평가, 더 높은 금액의 감정평가액, 적정 등급의 감사의견에 있는데, 그걸 제공하는 것이 서비스 질의 향상일까.
고객을 만족시킬 수 없는 이상한 서비스
아이러니하지만, 감정평가나 회계감사 서비스의 효용은 고객의 만족이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애초에 고객이 원해서 받는 서비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객은 원해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서비스를 받을 뿐이다. 제공받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주체는 대가를 지불한 고객 자신이 아니다. 신용등급을 이용하는 사람은 상업은행이 아닌 채권을 매입하는 투자은행이며, 감정평가액을 이용하는 사람은 영업점이 아닌 본점의 여신관리부이다. 회계감사보고서를 이용하는 사람도 기업이 아닌 주식시장 참여자들이다. 서비스의 대가를 지불하는 사람과 이용하는 사람이 다르고, 실제 서비스 결과를 이용하는 사람의 효용이 서비스 대가를 지불하는 고객의 효용과 다르다. 서비스의 질을 향상해도 고객이 만족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화에서 스탠다드푸어스가 정확한 신용등급을 부여했다면, 고객은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들은 무디스를 찾아갔을 것이다.
재판에 품질이 없는 것처럼, 신용등급, 감정평가액, 회계감사의견에 품질(quality)이 있을 수 없다. 서비스의 결과인 등급, 금액, 의견은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형 데이터가 아니라 범주형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범주형 데이터의 품질은 적정(proper)과 부적정(improper)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 부실평가, 부실감사라는 말은 있어도 최고급 감정평가, 최고급 회계감사는 없는 이유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