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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성범 Sep 17. 2021

남의 재산 평가하는데,
누가 좋다고 하겠어

어느 감정평가사의 변명

"원래 욕먹는 직업이야. 남의 재산 평가하는데 누가 좋다고 하겠어."

주니어 때였나, 어떤 선배 평가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인데 아직 울림이 남아 있다. 맞는 말이라서. 


우리 모두 평가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학창시절에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나의 수학능력을 등급으로 평가했고, 대학생 때는 교수님이 나의 학점을 평가했다. 직장인이 되었지만 본부장님께서 나의 근무태도를 평가하고, 심지어 고객이 되어 은행을 가도 나의 신용등급을 평가하더라. 인생은 평가의 연속이고, 평가 없이는 사회질서가 세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평가는 원래 '불확실한 것'을 어쩔 수 없이 '확실하게 해야할 때' 한다. 

수학능력, 학점, 근무태도, 신용등급을 생각해보니 대충 맞는 것 같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어떤 결과가 나왔든 내 생각과는 다른 것이 평가이다. 이견과 불만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평가주체의 권위와 평가기준의 공개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종국에는 공개된 평가기준에 점수나 등급을 매기는 것도 결국 사람일 뿐이다. 해소되지 않은 이견과 불만은 결국 평가주체에게 귀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


부동산의 가치도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과거에 성립한 가격 뿐인데, 아파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부동산은 과거의 가격이 없는 경우가 많고, 설사 있더라도 그 가격이 오늘의 가치인 것도 아니다. 부동산 시장은 가격표가 없는 매장인 셈이다.

국토교통부의 시세와 경실련의 시세 @한국경제


모두가 시세를 말하지만, 아무도 시세를 모른다.

편의점에서 물건을 살 때는 '가격'이라고 하지 '시세'라고 하지 않는다. 가격이 고정적이지 않을 때, 우리는 시세를 따진다. 시세는 누가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므로, 각자에게 유리한 시세가 있을 뿐이다. 모든 시세는 예측일 뿐이며 사후적으로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데, 거래가격이 많을수록 정확하다. 충분한 거래량이 전제되어야 시세로서 의미가 있다. 주식시세가 결정되는 주식시장을 보자. 주식시장의 상품(상장종목)은 1,000개가 채 되지 않지만, 거래량은 연간 1,000억 주이다. 엄청난 회전율이다. 시세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주식에 비해 부동산은 어떤가. 우리는 일생동안 부동산 거래를 몇 번이나 할까? 부동산 투자자가 아닌 한, 대략 대여섯 번 정도 아닐까. 성인이 되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몇 번의 월세 계약, 사회초년생이 되고 결혼을 하며 또 몇 번의 전세 계약, 생활이 안정되면서 한 두번의 매매 계약. 한국의 가구수는 2,000만 정도이니, 평균 수명이 80세라고 가정하면 연간 150만 건 정도의 거래가 일어나는 것이다. 실제 연간 주택 거래량이 그 정도 된다.


주택 외에는 어떨까. 한국에는 약 3,900만 필지의 토지가 있는데, 이 중 200만 건 정도의 부동산이 거래된다. 전체 부동산의 5% 수준이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더 심각한데, 경상북도와 전라남도는 2% 수준이다. 모든 토지가 한 번씩 거래되려면 50년이 걸린다. 주식 시장이 모든 상품에 가격표가 붙어 있는 편의점이라면, 부동산 시장은 하나하나 사장님께 가격을 물어야 하는 시골 점방인 셈이다.


경기도 개발제한구역 토지 @교차로터널


평가는 '어쩔 수 없을 때' 하는 것이다. 

각자의 시세가 다르지만, 같아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 거래가 이루어진다. 비록 두 사람의 합의일 뿐이지만,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가격은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합의한 물건의 가치가 된다. 가치가 결정된 물건에 감정평가사가 개입할 일은 없다. 아프지 않으면 의사를 만날 일이 없고, 골치 아픈 일이 없으면 변호사를 만날 일이 없는 것과 같다. 감정평가사는 각자의 시세가 좁혀지지 않을 때만 필요하다.


첫째, 이견이 개입될 때다. 대표적인 경우가 은행에서 의뢰하는 담보 감정평가이다. 밀고당기는 협상 끝에 10억 원에 단독주택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담보대출로 잔금을 치르기 위해 은행을 찾았다고 하자. 분명히 10억 원에 거래가 이루어졌으니 이 금액을 기준으로 담보대출비율만 적용해 대출을 해주면 좋으련만, 은행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10억 원이라는 가격은 믿지만, 그것이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거래당사자만 합의한 시세이기 때문이다. 대출은 어디까지나 원금 회수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원금을 회수하려면 해당 단독주택이 다른 사람에게도 10억 원의 가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의견이 개입될 때다. 대표적인 경우가 정부에서 의뢰하는 표준지 감정평가이다. 표준지 감정평가는 전국의 모든 부동산 중 2% 정도만 샘플링하여 감정평가 하는 것인데, 재산세 부과의 기초자료인 과세표준으로 활용된다. 취득세나 양도세처럼 거래가 있을 때는 거래가격을 과세표준으로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거래가 수반되지 않은 재산세, 상속세, 증여세는 과세표준에 활용할 가격이 없다. 눈에 보이는 가격이 없으니, 정부가 직접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직접 하지는 않고 감정평가사를 시킨다.



해소되지 않은 이견과 불만은 평가주체에게 귀속된다.

시세에는 정답이 없으며, 각자에게 유리한 시세만 있을 뿐이다. 감정평가사가 평가한 가치도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이견과 불만은 필연적이다. 모두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 평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좋은 평가는 없다. 공정한 평가가 최선의 변명일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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