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감정평가사의 변명
"대체 뭘 기준으로 평가한 겁니까"
일하면서 종종 듣는 말이다. 감정평가액에 불만이 있다는 뜻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감정평가는 많지 않다. 대립하는 이해관계의 사이에 끼어 있는 감정평가액은 늘 누군가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어느 정도가 적정합니까?' 공손하게 반문하는 경우도 있다. 민원인은 객관적이어야 할 의무가 없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불만을 넘어 이견을 제시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감정평가에는 '가치기준'이라는 것이 있다. 영문표기로 basis of value, 해석하자면 '가치를 추정하는 기준' 정도가 된다. 감정평가액을 결정할 때 해당 기준에 맞춰 결정하라는, 일종의 대원칙이다. 가치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것이 '시장가치(market value)'이다. 시장가치는 한국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는 일종의 국제 표준이다.
시장가치의 법률적 정의는 "통상적인 시장에서 충분한 기간 동안 거래를 위하여 공개된 후 그 대상물건의 내용에 정통한 당사자 사이에 신중하고 자발적인 거래가 있을 경우 성립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인정되는 가액"이다. 반대로 이해하면 쉽다. '통상적인 시장'은 경매나 입찰 같은 특수시장의 거래가격을 배제한다는 의미로, '충분한 기간'은 급매물의 거래가격을 배제한다는 의미로, '신중하고 자발적인 거래'는 기획부동산에 속아 거래했거나 특수한 사정이 개입된 거래가격을 배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거래가격은 걸러내고 보통의 거래가격을 기준으로 감정평가 하라는 것이다.
가치기준은 감정평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회계에도 '역사적 원가'이니 '공정가치'이니 하는 가치개념이 등장한다. 감정평가사들이 결정한 숫자가 감정평가액이라면, 회계사들이 결정한 숫자는 장부가액이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무엇을, 어떤 기준으로 측정해, 그 결과를 어디에 사용하는지만 다르다. 같은 물건이라도 측정기준(가치기준)이 달라지면 결과(가액)가 달라진다. 어떤 제조기업이 급매로 나온 공장을 시세보다 30% 저렴한 70억 원에 매입했다고 하자. 역사적 원가나 공정가치로는 70억 원이지만, 시장가치로는 그 이상이 된다. 급하게 매각해야 할 사정이 없었다면, 충분한 기간 매물로 있으면서 다양한 매수인들과의 밀고당기는 협상을 거쳐 100억 원에 팔려야 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각자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다
정답이 있는 숫자라면 '측정'하면 그만이지만, 정답이 없는 숫자는 '추정'의 대상이 된다. 추정의 법률적 의미가 '확실하지 않은 사실을 반대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 진실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듯이, 감정평가나 회계에서의 추정은 일정한 기준을 적용해 잠정적으로 숫자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추정은 누가 하더라도 동일한 결론이 나와야 하는 객관적 과학의 세계에 있지 않으며, 불가피하게 행위자의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행위이다.
시장참여자 누구나 각자의 가치기준을 가지고 있다. 감정평가나 회계처럼 규정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동일한 부동산도 파는 사람이 내놓은 가격과 사는 사람이 원하는 가격이 다른 이유는, 매도인과 매수인의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매도인과 매수인을 대리하는 중개인의 가치기준은 그가 누구의 입장을 대변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여기에 인정작업이니 업브리핑이니 해서, 중개인 스스로 수수료가 아닌 가격에 개입되면 더욱 복잡해진다. 서로 다른 가치기준이 합의에 이르러 어렵게 매매계약이 체결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담보로 대출을 시행하는 은행의 가치기준이 또 다르다. 다시 강조하지만, 추정은 불가피하게 행위자의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 없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 주관은 물론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기반한다. 매도인은 비싸게 팔고 싶어하고, 매수인은 싸게 사고 싶어한다. 시행사는 비싸게 사더라도 빨리 사서 개발사업을 통해 이익을 남기고 싶어하고, 은행은 부실 없이 안전하게 이자를 받고 원금을 회수하고 싶어한다.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보는 눈이 다르며, 부르는 가격도 다르다.
감정평가액이 시세보다 낮은 이유
감정평가도 일종의 정보서비스업으로 의뢰인이 요청한 시각의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은행의 요청으로 감정평가를 수행한다면, 원금의 회수라는 은행의 가치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원금의 회수라고 해서 속편하게 보수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원금의 회수는 어디까지나 대출상품이 판매된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시장가치 정의의 '성립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인정되는 가액'처럼, 과거 거래가격의 상한선으로 수렴하게 된다.
과거 거래가격의 상한선 수준으로는 매도인, 매수인의 가치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다. 이미 10억에 거래되었던 물건을 같은 10억에 팔고 싶은 매도자는 없고, 그런 매물을 소개받은 매수자도 없기 때문이다. 압축적인 경제 성장과 부동산 초과수요 시대를 거치며 경험한 물가(땅값) 상승이 '적어도 땅값은 떨어지진 않잖아, 사놓으면 언젠가 오르더라'는 경험칙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능성이 높은 어떤 미래의 가격도 이미 실현된 과거의 가격보다 확실할 수는 없다. 전문가의 의견이라기 보다 일종의 공적 증빙으로 활용되는 감정평가액은 조금이라도 확실한 곳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미국감정평가협회(AI, Appraisal Institute)는 1978년까지 시장가치의 정의를 "최고가격(highest price)'이라고 정의해왔다. 이러한 정의는 이론적 비판을 받고 통계적 추정의 개념인 "성립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매매가격(the most probable selling price)"으로 변경되었고, 한국 감정평가기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통계적 추정은 아파트값 폭등과 깡통전세가 공존하는 부동산 시장에서 '성립될 가능성'을 밝혀줄 수 있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