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모이면 군대 얘기를 하듯, 평가사들이 모이면 의레 묻는 말이다. 매년 가을이 되면, 업무경력이 3년 이상 된 시니어급 평가사들은 집체교육을 받고 전국 각지의 담당지역으로 출장을 떠난다. 공시지가 조사업무의 시작인 현장조사를 하기 위해서다. 주니어 시절에는 공시업무를 하는 선배 평가사들이 멋있기도 부럽기도 했다. 날씨 좋은 가을에 도시를 벗어나 몇 주씩 지역 전체를 돌아보는 일이 낭만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현실은 꼭 낭만적이지 않다. 업무량 때문이다. 한 명의 평가사가 조사해야 하는 토지가 많게는 1,000필지가 넘는 경우도 있다. 토지 한 필지당 조사항목이 총 35가지이니, 꼬박 몇 주가 걸리는 고된 출장이다.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도시지역은 좀 나은 편이지만, 차량을 이용해야 하는 비도시지역은 더 고충이 심하다. 조금 과장해서 꼬박 천 번을 차에 탔다 내렸다를 반복해야 할테니 말이다. 그리고 현장조사는 시작일 뿐이다. 가격조사, 지가결정, 보고서작성에 이어 온갖 협의, 검토, 검수, 심의, 위원회가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다. 물론 2월에 업무가 끝나는 것도 아니다. 2월부터는 토지 소유자들의 이의신청이.. 여기까지만 하자.
연간 공시업무에 투입되는 감정평가사는 1,000여 명이고, 이들이 조사하는 토지는 약 50만 필지. 전국에는 3,900만 필지가 있는데, 나머지 3,850만 필지는 어떻게 조사할까. 여기서부터는 지자체에서 담당한다. 매년 전 국토를 조사하기에는 비효율적이니, 샘플로 50만 필지(1.3%)만 감정평가사들이 조사한다. 나머지 필지들은 지자체의 기술직 공무원들이 담당한다. 이 둘은 표본과 모집단의 관계가 되고, 헷갈리지 않도록 각각 '표준지'공시지가, '개별'공시지가라고 부른다. 실제로 개별공시지가라는 모집단은 표준지공시지가라는 표본에 의한 통계적 추정(다중회귀분석법)으로 산정되고 있다.
공시지가 현장조사 자료
나는 땅이 없는데
전국 3,900만 필지 중에 개인 또는 법인이 소유한 토지는 2,700만 필지로 70% 수준이라고 한다. '나는 땅이 없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아파트 같은 집합건물에도 토지에 대한 권리(대지권)가 포함되어 있으니 토지는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 토지는 그렇다 치고, 건물은 어떻게 해야할까. 아파트처럼 토지와 건물을 구분하지 않고 한 번에 거래하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할까. 건물은 따로 계산해서 더해주는 걸까.
여기서부터 좀 복잡해지지만, 표로 정리하면 간단하다. 우선, 부동산의 용도를 기준으로 주거용과 비주거용을 나누고, 등기형태를 기준으로 토지, 토지+건물(별도등기), 집합건물(일괄등기)을 나누면 2X3의 표를 만들 수 있다. 일단, 주거용 부동산. 정부는 아무래도 국민들의 주거와 직결된 주거용 부동산을 가장 신경쓴다. 주택은 단독주택(별도등기), 공동주택(일괄등기)을 막론하고 일괄로 가격을 산정한다. 토지 따로 건물 따로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업무는 공기업인 한국부동산원에서 맡고 있다.
비주거용 부동산은 아직 토지와 건물을 각각 산정해서 합산한다. 비주거용 부동산도 주택처럼 일괄 산정할 수 있도록 관련 법이 개정되었지만, 아쉽게도 아직 시행되고 있지는 않다. 토지가격은 공시지가를 기준하고, 건물가격은 지자체나 국세청에서 산정한다. 복잡하다. 복잡할 수 밖에 없다. 감정평가사, 한국부동산원, 지자체, 국세청까지 동원된 참 복잡한 제도이다.
공시지가는 왜 매기는 걸까
공시지가, 영어로는 'Government Announced Land Price'정도 된다. 즉, 정부가 전 국토에 매긴 땅값이다. 공시가격은 공시지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토지 뿐만 아니라 건물, 집합건물까지 모든 종류의 부동산에 매긴 가격이 된다. 그러니까 이걸 왜 하는 걸까. 아무래도 정부가 편하기 위해서, 즉 행정상의 목적이 크다. 재산세 같은 과세를 비롯해 하물며 재난지원금까지도, 모든 행정은 국민의 개별적 조건에 맞춰 이루어지는데, 한국은 부동산 자산의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공시가격은 60여 개의 행정목적에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재산세나 상속세 같은 비거래 자산에 대한 조세행정, 기초연금이나 기초생활보장과 같은 복지행정, 개발부담금이나 재건축부담금 같은 건설행정, 그리고 감정평가사들의 감정평가에도 영향을 미친다.
외국에도 공시지가가 있을까
부동산(국토)은 국가의 성립조건이니, 해외 선진국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공시제도를 운영해야 할 것이다. 개별 국가들의 공시제도를 살펴보면, 주기와 방식에만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처럼 매년 공시하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3년(일본), 6년(독일)에 한 번씩 공시하는 국가들도 있다. 한국처럼 감정평가사와 공무원이 함께 일하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감정평가사가 전적으로 담당하거나(호주, 영국, 싱가포르, 뉴질랜드) 반대로 공무원이 전적으로 담당하는(홍콩, 독일) 국가도 있다. 방식에 있어서도 한국처럼 표본-모집단의 추정방식과 전수조사를 병용하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전수조사만 고집하는(독일, 영국, 뉴질랜드) 국가들도 있다. <끝>
※ 참고문헌
1. 「표준지공시지가 조사·평가를 위한 감정평가법인등 선정에 관한 기준」 (국토교통부,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