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서울스러운 로드무비 | 멋진 하루

모든 영화에는 부동산이 있다

by 오성범

'로드무비(Road Movie)'라는 영화 장르가 있습니다. 단어 그대로 주인공이 어딘가를 향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을 나열하듯 보여주는 영화를 말합니다. 기승전결 같은 사건의 인과적인 흐름이나 결말은 약하지만, 사건 자체의 내용이나 분위기는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의도된 메세지를 구체적으로 전달하기에는 불리하지만, 특정 관객들의 기분과 감정을 풍부하게 만들기에는 유리한 양식이고요. 고전 영화 중에서 <델마와 루이스>라던지, 이 책에서 소개해드리는 <노매드 랜드>, <멋진 하루>가 바로 로드무비에 해당합니다.


<멋진 하루>는 그 어느 영화보다도 서울의 모습을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로드무비인 만큼 특정 장소가 주된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울 전체가 배경이고, 장소의 이미지를 극화해서 보여주기보다 스냅사진처럼 동시대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전달합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저기 가보고 싶다'는 느낌을 받는 대신 '아, 나 저기 아는데'라는 느낌을 받는 것이죠.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도 각별한 캐릭터를 부여받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고요.


주인공 희수(배우: 전도연)는 옛 연인이었던 병운(배우: 하정우)에게 빌려준 돈 350만원을 받기 위해 용산의 '경마장'을 찾아옵니다. 용산 전자상가 근처에 있던 한국마사회 용산지점은 영화 촬영 당시까지만 해도 성업중이었지만, 도심 한복판 그것도 학교 앞 도박장 문제로 지역 주민들과 갈등을 빚다가 2017년 폐쇄되었고 지금은 농촌 출신 대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병운은 희수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희수의 차를 타고 돈을 빌려줄 만한 지인(주로 여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첫 번째 목적지인 '강남'에서 중소기업 사장에게 100만원을 빌린 후, 잠수교를 건너 강북으로 돌아옵니다. 두 번째 목적지는 '이태원'입니다. 강북 방향으로 잠수교를 건너면 보광동을 거쳐 이태원이 나옵니다. 한국이슬람교 사원과 외국인 푸드마켓이 있는 곳이죠. 병운은 여기서 마트 캐셔인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 40만원을 빌립니다. 보광동은 지금 단군 이래 최대 재개발이라는 한남뉴타운 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영화 촬영 당시만 해도 지정되어 있던 뉴타운은 2013년 폐기되었지만, 현재 5개 구역으로 나뉘어 개별적으로 진행 중입니다. 최근에는 가장 큰 3구역이 먼저 착공에 들어갔고 나머지 구역은 현재 관리처분계획 인가 단계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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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목적지는 '주상복합아파트'입니다. 이태원에서 용산미군기지를 지나면 고급 주상복합아파트가 모여 있는 삼각지역, 이촌역이 나옵니다. 병운은 여기서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성으로부터 돈을 빌립니다. 삼각지역에는 용산파크자이(2005), 대우월드마크(2007)이 있고, 이촌역에는 용산시티파크(2007), 파크타워(2009)가 있죠.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는 '타워팰리스'로 상징되는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가 집중적으로 공급된 시기이기도 합니다. 갤러리아포레, 마크힐스, 센트럴자이 같은 초고층, 초고가의 랜드마크가 지어지며 고급 주거를 상징했습니다.


네 번째 목적지는 '해방촌'입니다. 삼각지역에서 숙대입구역까지 올라와 후암동 방면으로 우회전을 하면 백범광장이 있는 남산공원 입구가 나옵니다. 남산 둘레길인 소월로를 따라 남산을 조금만 돌아가면 서울역을 비롯해서 후암동, 동자동, 청파동까지 용산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해방촌입니다. 병운은 여기서 사촌형을 만나 돈을 빌립니다. 해방촌은 영화 촬영 직후인 2010년 초, 경리단길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을 받으면서 소위 '핫플'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핫플이었던 경리단길 임대료가 치솟으면서 경리단길 상권이 길 건너 해방촌까지 확장된 것이죠. 북촌이 서촌 상권을 키우고, 신촌이 홍대를 키운 것처럼요.


두 주인공의 멋진 하루는 이후에도 북한남삼거리, 한남오거리, 두무개다리를 거쳐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신설동역, 구로디지털단지역을 지난 후 다시 한강대교를 건너 마지막 목적지인 서소문아파트까지 계속됩니다.

대부분의 기억은 장소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산에서 시작되어 하루종일 계속된 두 사람의 서울 여정은 주인공 병운과 그의 지인들 사이의 인연과 기억으로 만들어진 지도였으니까요. 여러분들의 서울 지도는 어느 지역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멋진 하루>

이윤기 감독, 2008


희수(전도연)는 서른을 훌쩍 넘겼다. 직장도 결혼도 마음같지 않고 통장 잔고도 바닥이다. 불현듯 옛 남자친구 병운(하정우)에게 빌려 준 350만 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돈을 받기로 결심한다.

희수는 경마장에서 병운을 찾아내고, 병운은 희수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희수의 차를 얻어 타고 아는 여자들을 찾아다니며 돈을 꾼다.


"넌 너대로의 사정이 있고, 난 나대로, 그 앤 그 애대로 사정이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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