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우리는 본래 부처”라고 말하면서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명 모순처럼 보입니다. 이미 부처라면 왜 깨달음을 얻어야 하고, 이미 사랑받는 존재라면 왜 죄를 지고 태어나야 할까요?
하지만 이때의 깨달음이나 원죄는 반드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무언가를 새로 얻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유를 자각하는 상징적 표현이며,
원죄 역시 인간이 불완전성과 분리를 경험하게 되는 실존적 한계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상징이 종종 절대적인 목표와 조건으로 해석된다는 점입니다.
“본래 부처이지만 깨달아야 한다”는 말은 어느 순간
‘깨닫지 못하면 불완전하다’는 결핍의 메시지가 되고,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은
‘하지만 죄를 씻지 않으면 그 사랑을 누릴 수 없다’는 조건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결국 사람들은 본래 자유로운 존재임에도, 무언가를 얻어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평생을 불안과 결핍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나 원죄를 상징으로 이해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깨달음은 도달해야 할 성취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온전함을 ‘알아차리는 과정’일 뿐이고,
원죄는 인간이 경험하는 분리와 한계의 은유일 뿐이지, 우리가 본질적으로 결함 있는 존재라는 선언이 아닙니다.
삶은 본래부터 완전하며, 영성은 목표를 이루기 위한 길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충만함을 자연스럽게 살아내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