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이윤주 저
세상에는 하루 여덟 시간의 근무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태어나는 수많은 키친 테이블 라이팅(kitchen table writing)이 있다.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중에서
책을 읽다보면 가끔씩 말이 술술 읽히고 꼭 내 마음 같은 글을 만나곤 한다. 그 작가가 글을 잘 썼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느낀다. 생각과 마음의 결이 비슷하다는 느낌. 마치 나만 알던 숨은 맛집을 “너도 여기 좋아해?” 하고 발견한 듯 마냥 뿌듯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다.
‘나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네? 나도 이런 느낌 느껴본 적 있는데!’
‘표현이 참 예쁘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어.’
‘어쩜 이렇게 내가 생각해오던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우리 만나 적이 있나?’
이윤주 작가님의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가 바로 그런 책이었다.
여전히 단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많다. 말은 매번 마음을 따라잡지 못하는 느낌이다. 내가 전하고 싶은 수많은 마음은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혼탁하거나 납작해진다.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중에서
나는 진실과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깝게 표현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에 말보다 글이 좋다. 말과 말 사이에는 시간의 거리가 너무 짧아서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내 순발력이 부족하다. 사람들의 시선과 대답해야 한다는 압박에 쫓기다보면 ‘아, 겨우 이렇게 표현될 마음이 아닌데.’ 하는 아쉬움이 남곤 한다. 나의 말도 매번 마음을 따라잡지 못한다.
반면 글은 쓰는 자에게도 읽는 자에게도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 몇 번이고 곱씹고 쓰고 고치고를 반복하다 마치 ‘낳는다.’는 느낌으로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글을 선보인다. 말은 취사선택이 어렵지만 글은 읽고 싶을 때, 읽고 싶은 주제로 맘껏 선택할 수 있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도 글의 매력이다.
그저 성인이 된 이후로 지금까지, 특별한 목적이 없으며 누가 의뢰하지도 않은 글을 버릇처럼 끄적였다는 뜻이다.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중에서
그래서 이렇게나 비생산적인 행위를 매일같이 하고 있다. ‘읽고 쓰는 일’ 말이다. 누군가 나의 글을 기다리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도 마음을 울렁이게 하지만, 아무도 내가 읽고 쓰길 기대하지 않는다는 그 점 때문에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다.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고 베스트셀러 책을 내는 작가들도 존경스럽지만 세상 어딘가에서 누가 의뢰하지도 않은 글을 묵묵히 써내려가는 동료 작가들이 있을 거라는 믿음은 나를 조용히 위로해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을 붙잡기 위해’ 쓴다. 타인을 위해, 세상을 위해, 역사를 위해 쓰지 못한다.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중에서
언젠가는 내 이름으로 책을 내보고 싶다는 어린 마음에 글을 쓰기 시작했었다. 시작해보니 출판을 위한 글과 내가 쓰고 싶은 글 사이에 약간의 이질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중이 읽고 싶어 할 글과 내가 쓰고 싶은 글 사이의 간격이다.
하지만 써보니 글쓰기는 작가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작업이라는 걸 알겠다. 마음속에만 있던 어떤 장면과 감정들을 몇 배로 확대해서 보고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더 이상 가볼 수 없는 장소나,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는다. 담아둘 감정은 진하게 담을 수 있고, 흘려보낼 감정은 시원하게 보낼 수 있다.
앞으로도 한동안 나를 위한 글을 쓸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입맛까지 고려할 재간은 아직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낳은 글들이 부담스럽거나 느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단정한 글을 쓰는 것이 내 작은 바램이다.